상장회사의 경우 0.01%의 주식을 6개월 이상 보유한 주주는 회사의 이사를 상대로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0.5%를 6개월 이상 보유하면 자회사나 손회사의 이사를 상대로 다중대표소송도 가능하다. 1%를 보유하면 6개월 보유 요건은 면제된다.
국민연금은 국내 자본시장의 가장 큰손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회사가 수두룩하다. 지금껏 국민연금의 ‘수탁자책임 활동 지침’은 공단 기금운용본부가 대표소송 여부를 결정하고 예외적 사안에 한해 보건복지부 주관 기금운용위원회 산하 기구인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가 맡는 것으로 규정해왔다. 그러다가 복지부는 지난해 12월 24일 대표소송을 적극 추진한다는 명분을 들어 그 결정 주체를 수탁위로 일원화하는 지침 개정안을 상정했고 이달 25일 기금위에서 논의된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말 국내 20여 개 사가 국민연금으로부터 기업 현안에 관한 질의서를 받았다고 한다. 대부분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을 부과받은 전력이 있는 기업들로 알려졌다. 국민연금이 지침 개정안 논의를 목전에 두고 수탁위의 존재감과 함께 대표소송 의지를 드러내는 사전 포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원회 형태로 운영되는 수탁위에 대표소송을 결정하게 하는 것은 아무런 책임 없이 권한만 부여하는 것이어서 수긍하기 어렵다.
첫째, 2021년 사법정책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1998년 2월부터 2020년 9월 사이 139건의 대표소송 판결이 지방법원에서 있었다. 청구 기각이 57건이었고, 소 각하도 38건에 달했다. 원고(주주) 주장을 전부 혹은 일부 인용해 피고(이사)의 손해배상을 인정한 판결은 44개에 지나지 않았다. 통계적으로 대표소송은 일반 민사소송에 비해 원고 승소비율이 상당히 저조하다. 하지만 대표소송의 제기는 회사 경영 활동과 관련된 사항으로 투자자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소송 제기 사실을 공시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시장은 소송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인다. 특히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는 공시만으로도 유의한 음(-)의 누적초과수익률을 초래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원고 측 패소율이 높은 만큼 국민연금이 극도로 신중하지 않으면 제소를 당한 회사는 경영상 애로를 겪고 사회적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국민연금이 패소하더라도 비상임 위원회 형태로 운영되는 수탁위에 책임을 물릴 방법도 없다. 결국 대표소송에 따른 최종적인 피해는 국민연금 가입자인 국민과 기업의 주주에게 돌아가게 된다.
둘째, 국민연금이 기업에 보낸 서한은 공정위의 행정처분 뒤에 국민연금의 대표소송이 뒤따른다는 것을 시사한다. 공정위의 과징금 제재를 이유로 국민연금으로부터 대표소송을 당한다면 기업으로서는 더욱 억울할 수 있다. 공정위의 ‘2020년도 통계연보’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20년까지 행정소송에서 공정위의 일부 승소가 17.2%, 패소가 12.6%나 되기 때문이다. 공정위의 과징금 처분만으로 이사의 책임이 있다고 쉽게 예단할 수 없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대표소송을 제기하면 그 회사 주가가 추락할 것은 자명하고, 설령 기업이 공정위를 상대로 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회사 가치는 단시간에 회복되기 어렵다. 회사는 행정처분 불복 소송에서 승소해도 상처뿐인 영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기업의 명운이 걸린 중대한 결정을 비상임 위원회에 지나지 않는 수탁위에 맡긴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것인가.
셋째, 대표소송은 주주가 회사를 대신해 회사를 위해 이사의 책임을 추궁하는 수단이다. 이사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회사가 나서서 그의 책임을 묻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를 게을리 하는 경우가 있다 보니 상법이 주주에게 앞장설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처럼 대표소송은 주주 개인의 소송이 아니라서 승소하더라도 그 결과가 회사에 귀속하며, 절차도 일반 민사소송에 비해 많이 복잡하다. 이 때문에 대표소송을 제기할 것인지의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법적 전문성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재 수탁위를 구성하고 있는 9인의 이력을 간단히 살펴보면 법률 전문가가 소수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설픈 판단으로 기업을 구렁텅이로 밀어넣을 수 있다는 우려가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탁위에 대표소송 제소 결정권을 부여하자는 게 웬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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