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이 올해로 창단 60주년을 맞았다. 1962년 발레 불모지에 뿌린 씨앗은 60년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또 열매를 맺어 세계적인 무용수를 배출했고, 낯설기만 했던 이 장르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2014년 발레단의 예술감독 겸 단장에 취임해 8년째(2017·2020년 연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강수진(사진)이다. “원석을 갈고 닦아 보석이 되도록 만들겠다”던 취임 일성을 차근차근 현실로 만들어 온 강 단장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국립발레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앞으로의 60년을 또 내다보며 초심을 다잡아야죠.” ‘강철 나비’다운 소감이었다. 강수진은 “허허벌판에서 출발해 지난 60년간 이곳을 거쳐 간 단장, 단원, 스태프, 후원자, 그리고 관객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다고 본다”며 60년 세월과 그 여정에 함께한 이들을 향해 경의를 표했다. 자부심을 드러내면서도 숫자가 주는 영광엔 취하지 않았다. 그는 “늘 무용수들에게 ‘이제 됐다(이루었다)고 하는 순간 내려가기 마련’이라고 말한다”며 “자부심과 자신감은 중요하지만, 늘 부족하다는 마음으로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오늘 잘해도 내일 다시 시작해야 하는 ‘무대의 냉혹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강수진이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배움을 향한 갈증 없이는 앞으로 나갈 힘도, 그 힘이 보여주는 미래도 만날 수 없다’는 이른바 ‘초심론’이다. “발레는 완벽하게 해낸 동작을 녹화해서 그것만 반복해서 보여주지 않아요. 매일매일 살아있기에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고, 그래서 배워야 하죠. 이게 바로 발레가 아름다운 이유고요.”
강수진은 발레리나로서 최고의 길을 걸어왔다. 1999년 한국인 최초로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우수 여성 무용수상의 주인공이 됐고, 2007년에는 독일 최고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카머텐체린 작위’를 아시아인 최초로 받았다. 최고의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그는 평생 신분이 보장된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종신 단원 직을 포기하고 지난 2014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강수진은 “늘 내가 받은 것을 언젠가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고,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발레단 예술감독 직을 맡았다”며 “그 와중에 60주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나에게는 큰 영광”이라고 웃어 보였다.
3년 임기로 시작한 일은 어느덧 연임을 거듭하며 8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 8년간 강 단장은 ‘안무가 양성을 통한 창작 발레 활성화’와 ‘프로그램 다변화를 통한 발레의 대중화’에 힘써 왔다. 취임 이듬해 시작한 안무가 발굴 프로젝트 ‘KNB 무브먼트 시리즈’는 올해로 7회째를 맞았다. 잠재된 안무력을 발굴하고 다른 장르보다 은퇴가 빠른 발레 무용수에게 제2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열어주고자 만든 기획으로 단원인 강효형, 박슬기, 송정빈, 신승원, 이영철 등이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중 강효형의 ‘요동치다’는 2016년 독일 슈튜트가르트 발레단 ‘넥스트 제너레이션’에 초청됐고, 강효형은 무용계를 대표하는 상인 ‘브누아 드 라당스’ 안무가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전보다 훨씬 과감하고 다양한 레퍼토리를 거치며 단원들의 기량도 향상됐다. 강 단장은 취임 첫해 네오클래식 발레인 ‘교향곡 7번’과 모던 발레인 ‘봄의 제전’을 동시에 선보이는 ‘교향곡 7번 & 봄의 제전’을 무대에 올렸다. 그는 “어떤 작품도 소화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발레단이고 무용수라는 마음으로 한 공연”이라며 “처음엔 단원들이 무척 힘들어했지만, 공연을 거듭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국립발레단은 이외에도 세계적 안무가인 존 크랭코의 드라마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국내 발레단 중 최초로 공연(2015)하는 등 새롭고 실험적인 시도로 관객 저변을 확대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렇게 원석은 빛을 내고, 정교한 모양을 잡으며 그 가치를 높여가고 있다. 강 단장은 “단원들이 믿고 따라준 덕에 (원석을 보석으로 만들겠다던) 목표를 잘 수행해가고 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러면서도 “하루 잘했다고, 혹은 몇십 년 잘했다고 그걸로 끝이 아니지 않으냐”며 “우리는 헝그리 정신으로 더 배우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 보석들이 오는 25~27일 국립극장 해오름 무대에 오른다. 올해 정기 공연의 포문을 여는 ‘주얼스’를 통해서다. 뉴욕시티발레단이 1967년 초연한 이 작품은 러시아 출신 미국 안무가 조지 발란신(1904~1983)이 보석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전막 추상 발레다. 3막으로 이뤄졌으며 각각 에메랄드, 루비, 다이아몬드를 모티브로 해 무용수들이 보석의 색깔인 초록색, 빨간색, 흰색 튀튀를 입는다. 지난해 발레단이 처음 선보인 작품으로 올해 창단 60주년을 맞아 또 한번 관객을 찾아온다. 강 단장은 “무용수와 모든 스태프의 노력으로 더욱 빛나는 무대”라며 "내가 원했던 발레단에 대한 바람이 녹아 있는 작품"이라고 애정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