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차량용 반도체 공급망이 마비되면서 현대자동차그룹이 반도체 사업 강화 전략에 사활을 걸고 있다. 내부에서는 자체 칩 개발 인력 확보에 집중하면서 외부 칩 업체와의 협력에도 적극 나서는 ‘투트랙’ 전략을 고수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칩 설계에 이은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라인 확보 여부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4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현대모비스는 자체 차량용 반도체 개발 경력직원을 채용하는 데 한창이다.
특히 다양한 종류의 반도체 개발을 염두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자율주행 등 첨단 운전 시스템을 지원하는 첨단 시스템온칩(SoC) 설계는 물론 전기차 배터리 전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전력 반도체 경력 연구원을 중점적으로 채용할 계획이다. 전력 반도체 분야에서 ‘차세대 실리콘’으로 주목받고 있는 실리콘카바이드(SiC) 반도체 연구 분야도 이번 채용 직군에 포함됐다.
현대자동차그룹이 반도체 경력 직원 채용에 나선 것은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채용처럼 현대모비스가 ‘반도체사업담당’이라는 조직 명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전문 인력 채용을 적극 추진하는 사례는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국내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가 거의 칩 설계 기업(팹리스) 하나를 운영한다 싶을 만큼 다양한 제품군을 보고 인력을 충원하는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현대차는 자체 칩 개발 외에도 복수의 토종 반도체 전문 업체와 협력도 추진하고 있다. 이번 채용 공고에도 포함된 분야인 절연트랜지스터(IGBT), SiC 칩도 국내 반도체 업체와 손잡고 제품 개발을 타진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아울러 지난해 3월 정부와 시스템 반도체 업체 주도로 출범한 ‘미래차·반도체연대·협력협의체’에 수요 기업으로 참여해 차량용 반도체 내재화 전략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국내 최대 반도체 회사인 삼성전자와의 협력 시도도 확인된다. 현대차는 지난해 말부터 삼성전자 고위 실무진과 만나 각종 정보를 공유하며 첨단 칩 개발 방안을 모색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해 12월 문재인 대통령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차 회장에게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차량용 반도체 분야에서 더 긴밀히 협력했으면 좋겠다”고 언급하며 양사 간 협력에 대한 시장의 기대를 높이기도 했다.
지난 3일 열린 현대자동차 인베스터 데이에서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차가 자체 칩을 100% 생산할 수는 없으며 다른 업체들과의 협력을 검토 중”이라며 “구체화하는 대로 공개할 예정”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현대차의 반도체 인프라 강화 움직임은 최근 자동차 시장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차량용 반도체 공급망 마비 현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세계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2020년 말부터 가파른 자동차 수요 회복세 이후 극심한 칩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의 80% 이상을 5개 회사가 점유하고 있는 데다 다수 칩이 레거시(옛날) 공정인 8인치 반도체 라인에서 생산되면서 초유의 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현대차도 지난해 반도체 재고 부족으로 수차례 생산 중단을 겪으며 칩 부족에 애를 태웠다.
게다가 자동차 시장의 전장화 트렌드도 큰 요인이다. 전기차·자율주행 시대 개화로 2030년에는 차동차 생산 원가 중 20%를 반도체가 차지할 만큼 시장에서 반도체의 잠재력과 존재감이 부각되고 있다.
향후 현대차는 칩 설계 분야 외 파운드리 라인 확보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칩 설계를 아무리 잘하더라도 제품을 생산할 곳이 없으면 공급망 문제를 쉽게 극복할 수 없다. 삼성 파운드리, SK하이닉스시스템아이씨, DB하이텍, 키파운드리 등 국내 파운드리 업체와의 긴밀한 협력 및 투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업계에서 나오고 있다.
이미 유럽 완성차 업체는 네덜란드 NXP, 독일 인피니언 등 굴지의 차량용 반도체 업체들과 지근거리에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 미국 인텔이 향후 10년간 110조 원을 투입해 독일에 신규 반도체 라인을 구축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현대차의 경쟁사들이 인프라 우위를 가져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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