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속에는 싹 틔우는 식물이 있고, 세계 어디든 다닐 수 있는 배가 있으며, 째깍째깍 멈추지 않는 시계도 들어 있다. 생명과 성장의 상징과도 같은 알이 복잡한 대도시의 주인공처럼 빛난다. 미국의 원로화가 래리 피트먼(70·Lari Pittman)의 최신작 ‘빛나는(Luminous): 알 기념비가 있는 도시’ 연작에서다. 결코 ‘그냥 알’이 아닌 이 ‘알’은 피트먼의 작업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 의미를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는 대규모 개인전 ‘불투명한, 반투명한, 빛나는’이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리만머핀 갤러리에서 한창이다. 지난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 전시 때 출품했다는 한국과의 인연이 있을 뿐, 그의 국내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1952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피트먼은 미술 명문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서 공부했다. 미국 개념미술의 선구자 존 발데사리(1931~2020)에게로 동료 학생들이 몰려들 때 주디 시카고(83) 같은 ‘1세대 여성미술’ 작가의 수업에 더 끌렸던 그는 1970년대에 페미니즘예술을 공부하는 유일한 남학생이었다. 그 이력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모두 알에서 왔다”라며 “알은 그 자체로 여성성의 상징”이라는 피트먼의 말뜻을 수긍할 수 있을 듯하다. 알은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피트먼의 자화상 같은 존재다. 종교에서 알은 부활의 상징이지만, 작품에서는 변화하는 능동적 주체로 등장한다.
피트먼은 평생 조수없이 홀로 손수 작업했다. “내 작품은 프레타포르테(기성복)가 아니라 오트쿠튀르(고급 맞춤복) 같은 것”이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글을 먼저 적은 후 그림 작업에 착수한다는 점이다. 언어와 개념이 먼저이고, 그 후 시각화가 이뤄진다는 뜻인데 그래서 전시제목과 작품명을 생각하며 감상하는 게 효과적이다. 전시장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작품을 감상하자. 전시 제목 중 ‘불투명한’에 해당하는 그림들을 먼저 만날 수 있다.
곤충과 새, 무표정하고 창백한 얼굴들이 등장하는 이 작업에서 알은 외부의 눈(目)처럼 우리를 바라본다. 불투명한 알의 껍질은 속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 안을 제대로 볼 수 없게 가리기도 하기에 ‘넘어야 할’ 존재다. 안쪽 벽의 작품들은 ‘반투명한’ 속성에 해당한다. 갈라진 알 너머로 깃털과 총, 원주민과 식민지 침략자들이 보인다. 화려한 색채의 장식적 그림으로 보이지만 피트먼은 정치사회적 비판을 상징적으로 그려왔고 인종갈등·성역할과 불평등·억압과 폭력에 대한 주제의식을 암시적으로 담았다. 지난달 미국 현지의 큐레이터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피트먼은 이 작품에 대해 “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알 밖에서도 벌어진다”면서 “우리는 알 안에 들어있다. (관객에게) 도약을 청한다”고 말했다.
출품작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지난 2020년 이후 작업한 것들이다. 가장 최신작이자 ‘투명한’에 해당하는 대작에서 알은 대도시의 기념비가 되어 빛난다. 작가는 “배타적인 불투명함에서 경계같은 반투명함을 거처 도달한 도시 풍경에서 알은 스스로를 드러내고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공공의 기념비가 됐다”라고 소개했다. 여전히 알쏭달쏭 은유적인 설명이지만 코로나시대의 불평등과 죽음들을 목격한 작가가 추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도시를 배경으로 희망과 기원을 제시하고 있음을 그림이 말해준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17년 서울에 진출한 글로벌 화랑 리만머핀 갤러리가 종로구 안국동 시대를 정리하고 용산구 한남동으로 확장해 마련한 재개관전이다. 이태원역 쪽으로 자리를 옮긴 리만머핀갤러리는 인근의 삼성문화재단 리움미술관과 현대카드 스토리지와 바이닐을 구심점으로 페이스갤러리, BHAK, 가나아트 나인원과 한남점, 갤러리바톤,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등으로 이어지는 ‘한남동 아트벨트’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라쉘 리만과 데이비드 머핀이 1996년 뉴욕에 설립한 리만머핀 갤러리는 홍콩을 넘어 서울로 진출했고, 지난 2020년에는 런던 분점을 개관했다. 최근에는 미국·중국의 주요도시와 대만 등지에서 한시적 전시공간을 운영하는 등 적극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전시는 5월7일까지.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ccsi@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