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정리된 선반 위에서 초콜릿과 쿠키, 껌과 쥬스, 세제와 향신료 등이 알록달록한 색으로 반짝이고 있다. 각각의 상품들은 구체적인 상표까지 보일 정도로 아주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물건 하나하나가 마치 “나를 뽑아 줘”라고 외치듯. 독일이 낳은 현대사진의 세계적 거장 안드레아스 거스키(67)의 대표작 ‘99센트’(1999)다. 대량 소비사회의 다채로운 물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풍경 속에 인간의 삶이 오히려 압도당한 듯, 사람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렌즈가 갖는 곡면의 성질 때문에 가장자리가 휘거나 흐릿해지는데, 거스키는 여러 곳에서 찍은 사진을 합성·조작해 수평과 수직이 반듯반듯한 특유의 화면을 구성한다. 각각의 선반을 따로 찍어 이어붙이면서 원근법마저 없앴고, 배경의 색채도 흐리게 처리함으로써 매대의 물품만이 부각돼 ‘소비문화’를 상징하게 했다. 거스키의 대표작인 ‘99센트’는 지난 2007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약 33억원에 낙찰돼 당시 현대사진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이후로도 가격은 계속 올라 40억원을 넘겼고, 2011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라인강Ⅱ’(1999)가 당시 환율로 약 49억원(430만달러)에 팔렸다.
거스키의 국내 첫 대규모 개인전이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오는 31일 개막한다. 대표작 ‘99센트’를 포함해 작가의 37년 작업을 전반적으로 보여줄 40여 작품이 선보인다. 현대사진의 스타산실인 독일 ‘베허학파’의 일원이던 그를 유명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파리 몽파르나스’(1993)도 만날 수 있다. 파리 최대 규모의 아파트 750가구를 완벽한 수평·수직 구도 속에 담은 작품이다. 너무나 현실적인 아파트의 모습이지만 똑같은 크기로 격자무늬를 이룬 창문들이 비현실적 느낌을 준다. 창문 너머로 벽지,조명,사람들의 움직임까지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우혜수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부관장은 “이 거대한 수평·수직의 구조는 끊임없이 확장돼 갈 것만 같은데, 개인이 저항할 수 없는 삶의 견고한 구조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기에 의미심장한 작업“이라며 “거스키의 작품은 사진이지만 추상적인 변화를 시도했고 성과를 이뤘다”고 평했다.
거스키가 지난 2007년에 직접 평양을 방문해 촬영한 ‘평양’ 시리즈도 선보였다. 북한의 최대 행사 중 하나인 아리랑축제의 매스게임 장면을 촬영했는데, 공산주의의 체제 선전은 완전히 배제한 채 10만명이 넘는 공연자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췄다. 가까이서 보면 그 얼굴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거스키의 ‘평양’ 시리즈는 리움미술관의 상설전시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 챙겨봐야 할 작품은 세계 최초로 공개된 2점의 신작이다. 2021년작 ‘얼음 위를 걷는 사람’은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뤼겔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촬영한 그의 작업실 근처 라인강변의 모습인데, 방역지침인 ‘거리두기’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특유의 패턴을 이뤘다.
예술을 애호하고 후원하는 아모레의 기업정신은 고(故) 서성환(1923~2003) 태평양화학 창업주에게서 시작됐고, 이를 물려받은 서경배 회장의 안목과 영향력은 ‘세계 200대 컬렉터’에 꼽힐 정도다. 서 회장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은 미와 영감이 가득한 창의적인 소통의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목표한다”면서 “이번 전시를 통해 사진이라는 장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인식하고, 한국 예술계에 영감을 주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8월14일까지.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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