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원료로 쓰이는 펄프 가격이 최근 급등세로 돌아섰다. 지난해 6월 이후 국제 펄프 가격은 완만한 하락세를 보이다 올 들어 상승 추세로 전환했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두 달 가까이 진행되는 동안 110달러나 폭등했다. 인플레이션 상황이 맞물리면서 글로벌 생활용품 기업들은 제품 가격을 인상하거나 같은 가격에 제품의 양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을 진행하고 있어 이 추세라면 국내 생필품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4일 산업통상자원부가 공개한 원자재 가격 정보에 따르면 3월 미국 남부산혼합활엽수펄프(SBHK)의 가격은 톤당 785달러로 집계됐다. 톤당 925달러로 최고치를 찍었던 지난해 6월과 비교하면 여전히 낮지만 675달러였던 올 1월 펄프 가격과 비교하면 19.8%나 뛰었다. 3개월 새 130달러가 폭등한 것이다. 1월에 675달러, 2월에 725달러로 급격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해 연평균 가격과 비교하면 올 3월 펄프 가격은 30% 이상 뛰어오른 상황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인 3월(725달러)과 견줘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산업부의 한 관계자는 “임업이 발달한 캐나다 서부에서 지난해 말 500년 만에 발생한 대홍수로 철도와 해상 운송이 막혀 펄프 공급에 커다란 차질이 생겼는데 그 여파가 여전히 국제 펄프가격 급등을 견인하고 있다”고 했다.
임업 강국인 핀란드 임업 그룹 UPM키메네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 장기화도 수급 불균형에 일조하고 있다. UPM키메네가 만드는 종이 라벨의 절반가량이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 수출돼 유럽 종이 공급량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상품 가격 조사 업체 패스트마켓RISI에 따르면 최근 독일의 비코팅 인쇄 용지 가격은 20여 년 만에 최고가를 기록하는 등 1년 새 4배 가까이 올랐다. 여기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두 달여가 넘게 길어지면서 펄프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것이다.
제지 업계의 발목을 잡는 변수는 또 있다. 또 다른 주 원재료인 재생 펄프(고지) 가격 역시 큰 폭의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고지의 가격이 20% 가까이 상승했고 수입 고지의 경우에는 2021년 평균 가격 대비 지난달에 무려 50%이상 올랐다. 국산 고지의 질은 수입 고지와 아직 큰 차이가 있어 제지 업계 대부분이 원재료의 상당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재무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주원료인 펄프와 고지의 가격 급등과 물류비 상승은 결국 제지 업계의 경영 비용 급증로 이어져 생필품 물가의 가격 상승을 부추길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무엇보다 공급망 차질로 치솟는 운송비는 펄프 조달 비용을 더 끌어올려 이런 추세라면 생필품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해상 운송은 어쩔 수 없지만 항구까지 이동하는 철로의 차선책은 트럭 운송밖에 없는 상황에서 트럭 운송 운임료가 기존 대비 두 배 이상 올라 펄프 구매 기업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펄프의 경우 원료와 제품의 부피와 중량이 커서 물류비용의 비중이 다른 업종에 비해 높기 때문이다. 당분간 펄프 가격이 오름세를 지속하면 펄프를 원자재로 사용하는 제품들의 가격도 인상될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종이와 화장지·생리대·기저귀·물티슈 등이 대표적인 생필품이다.
제지 업계 관계자는 “주요 원재료인 펄프와 고지는 인쇄용지, 위생 용지, 특수지 등 각종 제품에서 원재료비의 45~60%를 차지하고 있어 가격 급등은 국내 제지 업체들의 수익성 악화를 초래해 생필품 물가에도 직격탄이 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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