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종로11’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인 삼청공원에서 내렸다. 삼청테니스장을 지나 10분 정도 잘 다듬어진 길을 올라가니 왼쪽에 삼청탐방안내소가 보인다. 안내소 담벼락에는 ‘닫혔던 북악산 탐방로, 54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 공비의 청와대 기습 사건인 1·21사태 이후 통제된 것이 이번에 해소됐다는 의미다.
안내소에서 인식표를 받았다. 인식표는 나갈 때 반납해야 한다. 북악산을 개방한 초기에는 주민등록번호 등 인적 사항을 기록하고 방문증을 받았지만 이제는 이런 과정도 생략됐다.
입구를 들어서면 길옆에 철조망이 보이면서 이곳이 군사 지역임을 실감하게 한다. 월운교라는 자그마한 다리를 지나면 곧바로 시냇물 옆으로 등산길이 이어진다.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이 북악산에도 봄이 왔음을 알린다.
6일 개방한 북악산 남측 탐방로를 8일에 찾았다. 평일인데도 사람은 많다. 잘 관리돼 있는 것이 통제된 곳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청와대 ‘후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위쪽 한양도성 성곽 둘레길과 겹치면서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북악산 남측 탐방로는 크게 네모 모양이다. 삼청안내소를 지나 올라가면 길은 삼청쉼터에서 좌우로 나뉘는데 왼쪽은 만세동방 약수터로, 오른쪽은 법흥사터로 각각 올라간다. 물론 두 길은 끝에서 다시 만난다. 등반객은 위로 한양도성 둘레길로 더 올라갈 수 있다.
북악산 남측 탐방로의 진입로는 3곳이다. 삼청안내소는 앞서 기자가 올라온 길이고 다른 2개는 둘레길 북악산 구간에 진입하는 창의문안내소와 말바위안내소다. 창의문·말바위안내소는 기존에 있던 곳이고 삼청안내소는 이번 개방으로 새로 만들었다.
다시 삼청쉼터에서 시작하자. 계곡에 놓인 다리를 건너 만세동방 쪽으로 올라간다. 등반로는 잘 닦여져 있고 절반 이상이 나무로 만든 계단이다. 길은 언덕을 넘고 계곡을 가로질러 굽이굽이 이어진다. 한참을 가면 앞에 철제 담이 보인다. 바로 청와대의 북동쪽 경계다. 청와대 담에서 우회전해 다시 좁은 길을 올라가다 보니 북악산 남측 탐방로에서 가장 관심을 모은 만세동방이 있다.
안내판에는 ‘만세동방 약수터’라고 쓰여 있고 설명이 붙어 있다. 너른 바위에 ‘만세동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아래 바위틈에서 물이 흘러나온다. “약수터 바로 위에 있는 바위에 ‘만세동방 성수남극(萬世東方 聖壽南極)’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주변 계곡을 만세동방 계곡이라고 부른다. 누가·언제 새겼는지 알 수 없으나 글자의 내용으로 미뤄볼 때 나라의 번창과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만세동방 글씨는 한눈에 봐도 대단한 사람이 쓴 듯하다. 등반객들은 너나없이 글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만세동방에서 가던 길을 다시 재촉하면 남측 탐방로 코스와 한양도성 둘레길로 올라가는 코스를 나누는 지점이 나온다. 법흥사터를 보고 싶어 그대로 오른쪽으로 돌아 산을 다시 내려왔다. 법흥사터는 5분 정도 내려온 곳에 있다.
법흥사터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곳은 신라 진평왕 때 나옹 스님이 창건한 법흥사터라고 전해지는 곳으로 문헌에 따르면 ‘조선시대 세조 임금이 연굴사 동쪽(지금의 삼청터널 근처)에서 호랑이를 사냥했다’는 내용을 통해 연굴사터로도 추정된다. 또 절터 주변에는 15세기 상감분청사기 조각들이 발견돼 조선 전기부터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최근의 것이다. 1960년대 전후로 절의 중건이 있었지만 1·21사태에 이 지역이 폐쇄되면서 폐허가 됐다고 한다.
예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은 오전에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북악산을 기준으로 등반로는 좌측(방위로는 동쪽)에 위치해 있어 오후에는 전체에 그늘이 지면서 사진 찍기에는 좋지 않다. 남측 탐방로의 총길이는 3㎞로 대략 2시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다. 길가에 ‘꽃사슴이 살고 있어요’라는 팻말도 있는데 실제 사슴을 보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청와대 경호를 위해 군인들은 물론 CCTV가 촘촘히 배치돼 있다. 또 지정된 노선을 벗어나면 제지를 받는다. 이는 불가피한 조치로도 생각된다.
북악산은 2020년 11월 청운대에서 평창동으로 연결되는 북측면이 개방됐고 이번에 청와대 뒤편인 남측면 좌측이 개방되면서 산의 대부분을 둘러볼 수 있다. 다만 남측면의 우측(방위로는 서쪽)은 급경사라 탐방로가 없고 여전히 폐쇄돼 있다.
한편으로 북악산 남측 등반로에서 가장 인기 장소는 법흥사터다. 등반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곳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개방 하루 전인 5일 이곳을 둘러봤는데 법흥사터 초석(주춧돌)에 앉아 찍은 사진이 논란이 되면서다.
기자가 방문한 날도 한 여성이 초석에 앉으려고 하자 옆에 있는 어르신이 화를 냈다. 문화재 훼손이라는 주장이다. 여성은 이것은 문화재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말싸움이 될 수도 있는데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흐지부지됐다.
다른 사람들도 초석 위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기자가 한참을 둘러본 바에 따르면 “문화재도 아닌데 앉는 게 뭐 문제냐”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사람도 일부 있기는 했다.
사람들이 초석에 앉는 바람에 오히려 훼손 가능성이 커졌다. “중요한 문화재라면 앉거나 훼손하지 말라는 표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연히 그런 안내판은 없다.
만세동방 약수터 관리도 논란이다. 만세동방 약수터 앞에는 ‘음용 불가’라는 표지를 단 줄이 걸려 있다. 옆에 앉아 있던 어르신 이야기에 따르면 개방 첫날인 6일에는 이런 표지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도 자유롭게 물을 떠 마셨다는 것이다. 경고문은 7일부터 생긴 셈이다. 안내판에는 분명히 ‘만세동방 약수터’라고 적혀 있다.
물을 마시려고 돌을 만지는 사람이 늘면 글자도 훼손될 수 있다. 법흥사터 초석 등 유물과 만세동방 약수터의 관리를 위한 추가 보완 조치가 필요한 셈이다.
글·사진=최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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