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오 헨리의 단편 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원제 ‘동방박사의 선물’)에서 가난한 신혼 부부 델라와 짐은 서로 성탄절 선물을 주고 싶었다. 델라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팔아서 남편이 아끼는 손목시계에 어울리는 시계줄을 샀다. 짐은 아내를 위해 손목시계를 팔아 비싼 머리빗을 샀다. 결국 아무런 쓸모 없는 선물들만 남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 지 깨닫고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현대 경제학자들의 눈으로 보면 이들의 행위는 비합리적인 선택에 따른 ‘조정 실패’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머리카락과 시계를 팔아 현금을 서로 줬으면 각자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었는데 ‘불완전한’ 선물을 주고받음으로써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는 것이다.
신간 ‘초(超)가치- 돈으로 살 수 없는 미래’는 인간적인 가치를 시장 가치로만 평가하는 이 같은 시장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가치에 대한 인식이 오로지 교환가치, 즉 시장 가격으로 바뀌면서 코로나 19 팬더믹과 기후위기, 금융위기, 불평등 심화, 전쟁과 식량난 등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저자는 국제 금융계 거물인 마크 카니다. 그는 2008~2013년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로 있으면서 캐나다가 주요7개국(G7) 가운데 2008년 금융위기를 가장 빨리 회복하는데 기여했다. 2013~2020년 외국인 최초로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 총재를 역임할 때는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와 코로나 팬더믹에 따른 혼란을 수습하는데 성공했다.
책은 ‘요즘 사람들은 모든 것의 가격은 알면서도 그 어떤 것의 가치는 알지 못한다’는 19세기 영국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의 경구가 어떻게 우리 사회에서 현실화하고 있는지 탐구한다. 가령 인터넷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의 시가 총액은 약 1조5400억 달러에 이른다. 2021년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미래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반면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브라질 아마존은 어떤가. 콩을 재배하거나 가축 농장을 만들어야, 바꿔 말하면 열대 우림과 생물 다양성을 파괴해야 시장가치를 인정받는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지구촌의 불특정 다수에게 돌아간다.
“어떤 것의 가치, 어떤 행동이나 어떤 사람의 가치가 금전적인 가치, 구체적으로 시장에 결정되는 금전적인 가치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매매의 논리가 물질적인 재화에만 한정되지 않고 보건, 교육, 치안, 환경보호 등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많은 영역에서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
시장에 대한 믿음이 불가침의 신앙 수준으로 높아진 결과는 ‘시장 경제’가 아닌 ‘시장 사회’이다. 시장 가치의 영역이 무차별적으로 팽창하면서 시장 경제를 지탱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즉 공정성, 친절함, 열정, 이성, 지속가능성 등과 같은 우리 사회의 인간적인 가치까지 위협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부의 유토피아이자 인간성의 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다. “시장은 사회 발전에 꼭 필요한 요소지만 그냥 내려두기만 한다면 시장은 사회의 가치관을 좀먹고 만다.”
저자에 따르면 가치와 가격을 동일시하기 시작한 것은 신고전주의자의 등장 때부터다.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칼 마르크스 등 고전주의 학자들은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는 투입된 노동에 의해 주로 결정되고 새로운 기술과 생산방법이 가치 창조를 촉진하고 가치의 분배를 바꾸어놓는다고 봤다. ‘자유 방임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미스조차 “돈을 자본과 동일시하며 경제적 자본을 그것의 사회적 동반자와 분리하는 데서 빚어지는 실수들을 경고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스미스는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며 무조건 옹호한 게 아니라 “당대의 문화, 관행, 전통, 신뢰 속에 구축된 살아 움직이는 기관”, “사회 질서의 한 부분”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신고전주의자 이후 주류 경제학자들은 가치 개념이 주관적이며 시장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어떤 것의 가치, 즉 가격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가격에 반영되지 않은 근원적이거나 내재적이거나 혹은 본질적인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오늘날에 널리 받아들여졌고 어떤 것의 가치를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동일시하는 현상이 점점 일상화되고 있다.
저자는 이 같은 시장 근본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면서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사회 계약인 ‘모든 세대가 소득의 상대적 평등과 기회, 공정성의 상대적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가치관이 훼손되고 있다고 본다. 특히 시장 만능주의는 규제를 최소함으로써 글로벌 신용위기, 코로나19위기, 기후 위기를 촉발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이 같은 3가지 위기 극복을 위해 정치 지도자와 기업가, 투자자, 국가의 역할을 재정립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조목조목 제시한다. 이들이 가져야 할 공통적인 가치관은 역동성, 회복력, 지속가능성, 공정성, 의무, 연대, 겸손함이다.
저자는 서두에서 이 책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에게 내준 숙제에 대한 뒤늦은 답변이라고 말한다. 몇년 전 카니는 BOE 총재 시절 정책 당국자, 기업인, 노동계 인사, 자선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바티칸에 모여 프란치스코 교황과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교황은 “우리가 하는 식사 처음에는 향미, 색, 풍성한 맛, 알코올이 포함된 와인을 곁들입니다. 와인은 우리가 가진 모든 감각을 풍부하게 해줍니다. 마지막에는 와인을 증류해 알코올뿐인 그라파를 마실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교황은 그 뒤 이렇게 말한다. “인간성에는 많은 것이 포함됩니다. 열정, 호기심, 이성, 이타주의, 창의성, 이기심…. 그러나 시장에는 단 하나, 이기심만 있습니다. 시장은 인간성을 증류한 것이지요. 여러분이 할 일은 그라파를 다시 와인으로 돌려놓는 것, 시장을 다시 인간성으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이건 신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현실의 문제이고, 진리의 문제입니다.” 3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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