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비해 한국의 연구개발(R&D) 풍토는 주어진 과제는 잘하지만 도전하고 실패를 관리하는 문화는 크게 부족합니다. 특히 항공·우주·국방 분야에 도전하는 기업 생태계가 너무 작아요.”
한국계 미국인인 류봉균(52·사진) 에피시스사이언스(EpiSys Science) 대표는 14일 서울경제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미국 R&D 기반 국방 시장이 주 무대지만 한국에도 법인이 있어 양국 간 현격한 R&D 문화 차이를 느끼게 된다”며 이같이 밝혔다. 미국 컬럼비아대 박사인 그는 2012년 자율 시스템용 인공지능(AI) 개발사를 창업해 지난 3년간 연 100% 이상 성장하며 연 매출 1억 달러 이상을 기록 중이다. 앞서 그는 보잉 계열사인 휴즈리서치랩 매니저에 이어 두 차례 국방 벤처기업 근무 시절 인수합병(M&A)을 경험했다.
우선 그는 “미 국방부의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 연구 과제를 25년 이상 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해 한국 R&D 과제에 지원했는데 관료 중심적 기획·관리 시스템에 기반한 평가 체계를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한국은 관료적 R&D에 포퓰리즘식 지원 문화가 더해져 공정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미국 R&D 문화와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10~20년 뒤를 내다보고 문제를 정의하고 인재 풀을 키워나가는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나눠주기식 R&D와 논문·특허 위주 문화로 인해 대학과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기술이전과 창업 등 기술 사업화가 잘 안 된다”고 꼬집었다. 잘하는 곳을 집중 지원하는 게 아닌 데다 연구원도 감사를 의식해 복지부동하는 경향이 있어 도전적 R&D 문화 구축이 힘들다는 얘기다. 출연연에서 블라인드 방식으로 연구원을 뽑는 것도 ‘난센스’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승자 독식 사회인 미국 방식이 다 맞다고 볼 수는 없지만 미국은 과제 하나를 선정할 때 2~3개를 뽑아 치열하게 경쟁을 시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며 “미국도 R&D 관리를 많이 하나 개발자의 의견을 많이 존중하고 과제 수행 중간에도 상호 협의해 수정한다”고 전했다. 한국처럼 처음 계획대로 그대로 가야 하는 경직된 구조가 아니라 탄력적으로 대처하되 실패해도 문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가 한국형 DARPA 설립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서도 “지금의 R&D 시스템을 도전형으로 전환하고 실패를 관리하며 실력에 따른 공정 경쟁이 가능한 생태계를 갖추지 않으면 성공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은 연구자가 제안하는 기초연구가 문재인 정부에서 2배나 급증(연 2조 5000억 원)했다고 하지만 ‘미국에서 DARPA를 하니 벤치마킹하자’는 식으로 해서는 시행착오가 클 것이라는 게 그의 우려다. 미국식 R&D DNA를 가져오지 않고 자칫 껍데기만 참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DARPA의 지원으로 위성항법장치(GPS), 인터넷,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이 태동하는 근거가 마련됐는데 관료가 아닌 개발자가 영웅 대접을 받는다는 점도 소개했다.
류 대표는 “한국은 글로벌 수준의 R&D 풀이 다양하지 못하고 미국 등을 참고해 유행을 좇는 경향이 있다”며 “과제 스펙에 맞춰 개발하느라 도전적·모험적 연구를 하기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미 과학기술 동맹 차원에서 톱다운 협력 과제 프로그램도 있지만 보여주기식이 주를 이룬다고 꼬집기도 했다.
그는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이라 실리콘밸리와 국방 벤처사들의 좋은 기술을 공유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며 “현지의 좋은 회사를 M&A하고 한국계 미국인 등 현지 인재 풀도 관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어 “한화 같은 한국 국방 회사가 미국 국방 회사를 사서 현지식 경영을 하면 글로벌사가 될 수 있다”며 "영국 국방사인 BAE도 그렇게 했고 이스라엘 회사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서도 소프트웨어 파워를 키우고 소프트웨어사와 하드웨어사 간 협력이 잘 이뤄지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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