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는 썼고 앞으로 상어·멸치·김 등을 소재로 소설을 쓸 예정입니다.”
정보라 작가는 단편소설집 ‘저주토끼’가 세계 3대 문학상인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선정된 것을 기념해 번역가인 안톤 허(본명 허정범)와 함께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차기작을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그는 “포항 남자를 만나 포항으로 시집 갔는데 제사상에 저만 한 문어가 오르는 게 너무 충격적이라 해양 수산물 시리즈를 구상하게 됐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5년 만에 1일 재출간된 ‘저주토끼’는 부커상 효과에 힘입어 온라인 서점 ‘예스24’ 기준으로 이달 셋째 주 판매량이 전주보다 11배나 늘면서 종합 베스트셀러 12위에 올랐다. 국내외 관심이 커지면서 정 작가의 장편 ‘붉은 칼’과 소설집 ‘그녀를 만나다’도 영문판 출간 계약을 앞두고 있다. 정 작가는 예상보다 많이 몰린 기자들에게 “난생 처음 이런 관심을 받게 돼 얼떨떨하다” “부끄럽다”며 간담회 팸플릿으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시종일관 웃음과 유머로 얘기를 풀어나갔다.
‘저주토끼’는 저주 용품을 만드는 할아버지가 친구의 원한을 갚기 위해 만든 저주토끼가 온 집안과 사람마저 갉아먹고 변기에서 머리가 튀어나오는 기괴한 얘기를 담고 있다. 정 작가는 “‘저주토끼’는 고통과 상실에 관한 외롭고 쓸쓸한 이야기 모음”이라며 “‘부정의한 세상에서 저주로 나쁜 놈을 망하게 했다’고 해서 피해자들이 모든 것을 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어떤 일들이 일어났고 세상은 어느 정도 부조리하고 부정의하기 때문에 그런 건 계속 안고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커재단 측은 후보 선정 이유에 대해 “정보라는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활용해 현대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참혹한 공포와 잔혹함을 이야기한다”고 평가했다. 정 작가는 “책을 쓸 때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썼는데 부커재단에서 높이 평가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하지만 허 번역가는 “작품을 발견할 당시 영미권에서 너무나 잘 먹힐 것이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며 “문학성이 돋보이고 문체가 뛰어나 누가(다른 번역가가) 먼저 책을 낚아챌 수 있다고 걱정해 비밀리에 작업할 정도였다”고 극찬했다. 그는 이어 “장르 문학이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오해가 많은데 정 작가는 문학 전공이라 문학성에 치중을 많이 하고 이야기가 참신하다”며 “다방면으로 잘될 책이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동안 한국문학의 해외 진출은 중년 남성 소설가들, 특정한 기성세대 문학 중심으로 전개돼왔지만 한국에는 여성 문학과 장르 문학, SF가 풍부하다”며 “이번 부커상 최종 후보 선정은 우리나라 장르 문학의 문학성에 대한 증거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SF 작가가 된 이유에 대해 “대학 시절 문학상(연세문학상)에 당선되면 상금 100만 원을 준다고 해서 쓰기 시작했다”며 “돈을 벌기 위한 욕망이 창작자가 된 계기”라며 웃어넘겼다. 정 작가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에 대해서는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면서 “(책을 읽은 뒤) 화장실에 가면 뭐가 나올까 봐 두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화장실에 가셔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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