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말 외환위기 사태가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한국의 15대 대통령 선거 다음 날인 12월 19일 미국 백악관 상황실 지하 벙커에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 샌디 버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루빈은 그해 12월 3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조치 발표에도 한국에서 외국인 자금이 탈출하자 경제 회생 가능성이 없다면서 시장 논리에 맡기자고 했다. 이때 한국을 국가 부도 위기에서 구한 것은 미국의 외교안보 라인이었다. 올브라이트와 코언은 한국에서 정치·사회적 혼란이 발생하면 미군이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북한의 남침을 유발할 수 있다면서 루빈을 코너로 몰았다. 결국 한국에 대한 조기 구제금융이 결정됐다.
운도 따랐다. 당시 빌 클린턴 미국 행정부는 인권과 민주화 투쟁에 평생을 바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에게 우호적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훗날 “김 대통령을 굉장히 존경했다”고 회고했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후손인 올브라이트는 회고록에서 김 대통령에 대해 “(체코 초대 대통령인) 바츨라프 하벨이나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넬슨 만델라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라고 했다. 요즘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 한 통 못 하는 현실과 대비된다. 올 1월 트럼프 취임식 때 여야 정당의 방미단은 취임식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한국이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것은 우리 부모 세대들의 헌신 덕분이다. 비극적인 현실이지만 남북 분단을 초래했던 미소 냉전 구도도 한몫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공산주의 저지를 위한 동북아시아 전초기지로 삼아 대규모 원조와 안보 우산을 제공했다. 1990년대 이후 미국에 한국은 미국적 가치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자랑거리였다. 한국은 미국의 군인을 희생해 지원한 국가들 중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이룬 유일한 사례였다.
미국 안보·국방 관련 인사들의 한국 애정은 경제 위기 때마다 버팀목이 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미국이 한국과 통화 스와프를 체결한 것도 ‘혈맹’이라는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는 군 출신 정치인들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한국에 대한 미국의 ‘관세 폭탄’ 강도가 낮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논법은 거꾸로다. 그동안 군사적으로 많이 도와줬으니 돈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한국·캐나다·유럽연합(EU) 등 우방부터 겨냥해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다. 다른 나라의 약점을 공격해 강대국끼리 이권을 나눠 먹고 영토 확장을 노리는 등 제국주의 시대의 향수를 숨기지 않고 있다. 미국의 단일 패권을 지탱해왔고 한국의 선진화를 이끌었던 민주주의, 자유무역, 동맹과의 협력 등 보편적 가치는 온데간데없다. 이를 틈타 중국·러시아 등이 활동 공간을 넓히면서 지역 간, 권역 간 안보·경제 충돌이 우려되고 있다.
우리 정치권이 초당적으로 협력해도 위기를 극복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데도 여야는 국민들에게 인내를 호소하기는커녕 조기 대선을 의식해 정쟁만 일삼고 유권자 환심 사기에 바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아직 오지도 않은 인공지능(AI) 시대를 내세워 ‘주4일제 도입’ ‘증세 없는 기본 사회’ 등 장밋빛 미래를 제시한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드론 전쟁인데 수십만 젊은 청년들이 왜 군대 막사에 앉아 세월을 보내고 있나”라고 말한다. 트럼프에게 주한미군 철수의 명분만 던져주는 꼴이다. 국민의힘은 정책 비전을 내놓지 못한 채 ‘반(反)이재명’ ‘윤석열 대통령 탄핵 철회’만 외치고 있다.
우리 경제는 오일쇼크·외환위기 등 숱한 위기를 기회로 바꾸면서 성장 스토리를 써왔다. 문제는 반복된 위기를 극복한 성공담에 도취해 위기 자체에 둔감해졌다는 점이다. 지금은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내우외환 국면이다. 지난 10년간 허송세월하는 바람에 저성장 고착화 위기에 처했고 한국의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국제 질서와 가치 동맹이 무너지고 있다. 정치인들이 자신들 살겠다고 국론 분열을 조장하면서 과거 위기 극복의 원동력이었던 한국 특유의 회복 탄력성과 응집력마저 사라지고 있다. ‘국민 내전’이라는 극한 용어까지 여야 지도부 입에서 나온다. 이러다 정말 안보·경제 복합 위기가 올 수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