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품단가 연동제는 가격이 수요와 공급에 의해 자유롭게 결정돼야 한다는 시장 원리를 깨뜨릴 위험이 있습니다. 연동제가 도입되면 대기업이 구매선을 중국·동남아 등으로 전환해 오히려 중소기업이 어려워지고 국내 경제가 위축될 수 있습니다.”
글로벌 금융 위기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던 2008년 백용호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은 납품단가 연동제 도입에 반대하는 이유를 이같이 밝혔다. 납품단가 연동제는 원자재 가격이 오를 경우 가격 상승분을 자동으로 납품 대금에 반영하는 제도다. 이명박 정부는 고물가에 대응하기 위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업무 보고를 받을 때부터 납품단가 연동제를 추진했으나 부작용이 더 크다는 판단에 따라 ‘조정협의 의무제’를 도입하는 데 그쳤다.
납품단가 연동제에 회의적이던 공정거래위원회가 윤석열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입장을 바꾼 가장 큰 요인으로는 가파른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중소기업의 경영난이 꼽힌다. 당장 생산자물가지수 상승률은 지난해 4분기 이후 9~10%(전년 대비)를 오르내리고 있다. 특히 올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은 원자재 가격의 고공 행진에 기름을 부었다. 뿌리·건설업종 중기의 경우 무려 73.5%(중기중앙회 304개사 설문)가 ‘관행적인 단가 동결·인하 때문’에 원자재 가격을 납품 대금에 반영하지 못했다는 조사도 나왔다.
이번 추진에는 친시장을 앞세운 인수위의 고민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 당선인은 경제정책의 지향점으로 ‘민간 주도 공정 혁신 경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민간 주도’가 자칫 대기업 중심으로 흘러갈 우려가 있는 만큼 ‘공정’ 키워드를 중소기업 지원책으로 풀어가겠다는 의도다. 윤 당선인은 “협상력이 약한 중소기업이 대기업과의 거래에서 원자재 가격 급등의 피해를 일방적으로 부담하지 않고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공정위로서는 새 정부와 코드를 맞출 필요성도 있다. 문재인 정부의 ‘재벌 개혁’ 기조에 힘입어 기세등등했던 공정위의 입지는 차기 정부에서 축소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실제 공정위는 인수위에 과장급 1명만 파견한 데다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이 취임 초부터 공들였던 온라인플랫폼공정화법 등은 원점에서 재검토되는 처지에 놓였다. 이에 대기업 규제보다는 하도급거래에서의 불공정 개선에 초점을 맞춰 납품단가 연동제에 대응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장경제의 핵심인 경쟁을 해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류성원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정책팀장은 “입법으로 납품 단가 연동을 강제할 경우 대기업은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해외 협력 업체로 부품사를 변경해버릴 유인이 커진다”며 “대기업이 최종 소비재 가격에 인상분을 반영하면 소비자 물가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원자재 가격이 내려갔을 때 대처가 애매하다는 지적도 있다. 현행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원청업체가 위탁 당시 정한 대금을 하도급업체의 동의 없이 감액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거래상 우월적 지위를 가진 대기업은 어떤 식으로든 쉽게 대금을 낮출 수 있다”며 “이러한 수직적 지위를 보완하기 위해 연동제를 도입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수위가 중소기업 지원책으로 납품단가 연동제를 검토하고 있지만 거래 구조상 중소기업에 마냥 긍정적이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국내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하도급을 준다지만 이들 중소기업이 또 다른 중소기업과 2차·3차 하도급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원자재 재고를 많이 확보해뒀거나 원청업체와 유리한 협상을 해둔 기업은 오히려 피해를 입을 여지도 있다. 중소기업의 원가 절감, 기술 혁신 의지가 꺾일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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