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주식시장이 지정학적 리스크, 매크로(거시) 변수로 하락세를 면치 못하자 기업들이 전환사채(CB)의 전환가액을 연달아 하향 조정하면서 투자자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잦은 리픽싱은 유통되는 주식 수를 늘게 하는데 잠재적 매도 물량(오버행) 리스크로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19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상장사들이 시가 하락으로 전환가액을 조정한 건수는 올해 들어 477건으로 지난해(263건)에 비해 81%가량 폭증했다. 지난해 1월과 2월의 전환가액 하향 건수는 각각 51건, 81건에 불과했지만 올해 초반 증시 하락 국면에서 141건, 157건으로 크게 늘었다.
CB는 사채와 주식의 중간 성격으로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고 있는 채권이다. 상장사들은 낮은 이자율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 신용도가 낮으나 성장성이 높은 경우 CB를 자금 조달 수단으로 이용한다. 채권을 발행할 때 채권과 주식의 교환 비율을 전환가격으로 정해두는데 주가가 전환가격보다 낮아지면 전환가액을 조정하는 식으로 대응한다.
문제는 전환가액을 낮추면 시장 유통 물량이 늘어나 기존 주주의 주식 가치가 희석된다는 점이다. 아울러 대규모 물량이 주식시장에 쏟아져나올 수 있는 오버행 리스크가 커지면서 기존 소액주주들의 피해가 늘어나는 구조다.
금융 당국은 지난해 12월부터 주가 상승 시 상향 조정 리픽싱을 의무화하고 최대주주 지분율 제한을 두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효과는 미미한 상황이다. 개정된 ‘증권의 발행 및 공시 등에 관한 규정’의 적용 대상이 지난해 12월 이후 발행된 CB로 제한돼서다. 실제 상장사들은 개정안이 적용되지 않는 지난해 11월에 CB를 무더기로 발행하며 막차를 탔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발행된 CB 규모는 1조 4647억 원에 달하는 반면 증발공 적용이 시작된 12월에는 5735억 원 규모로 급감했다.
CB를 발행한 상장사들은 시가 하락을 틈타 전환가액을 조정하면서 기존 주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만 정작 시가 상승으로 리픽싱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지난해 12월 이후 전환가액을 상향한 경우는 단 3건에 불과하다.
KH필룩스가 1월 발행한 제22회차 사모 전환사채는 개정안 적용 대상이 되면서 두 차례 전환가액이 상승해 이달 13일 기준 2584원으로 조정됐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이전에 발행된 다른 CB들은 하락한 시세를 반영하며 수차례 리픽싱된 반면 주가 상승 국면에서는 단 한 번도 전환가액이 상향 조정되지 않았다. 기업과 CB 투자자 입장에서 전환가액이 상승하면 시세 차익이 줄어들기 때문에 규정 적용 대상이 아닌 CB들은 주가 상승 국면에서도 전환가액을 상향하지 않은 것이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리픽싱 횟수를 제한하는 등의 방법으로 무차별적인 전환가액 조정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만 기업 자금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새로운 제도의 효과를 지켜본 후 추가 조정을 하는 등 점진적인 개선을 진행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CB 전환가격 하향은 거래 물량이 늘면서 지분 희석이 발생하고 주가에 부담이 가해지면서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며 “물량이 한꺼번에 시장에 몰려나올 가능성이 있어 오버행 부담도 늘어나는데 리픽싱 규제의 효과가 나타나려면 시간이 조금 더 소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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