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본관 옆. 2016년 설립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이 있다. KIST 설립자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본관 안에는 초대 소장인 고(故) 송곡 최형섭의 흉상이 2018년 들어섰다. KIST는 우리나라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피의 대가로 1966년 최초의 정부 출연 연구원으로 설립됐다. 린든 존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1000만 달러를 원조하겠다’고 하자 박 전 대통령이 ‘정부 출연금까지 합쳐 과학기술연구소를 만들자’고 한 것이다. 송곡은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라는 회고록에서 “박 대통령이 KIST 설립 후 3년간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씩 꼭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눴다”며 “연구소 위상을 높여줬고 장관들이 뭔가 반대할 때마다 방패막이가 돼줬다”고 전했다.
# 올해 정부가 대학·출연연·기업에 지원하는 연구개발(R&D) 지원액은 총 30조 원으로 정부 전체 예산의 5% 가까이에 달한다. 앞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사태의 해결사로 나선 김대중(DJ) 정부는 R&D 투자 비중을 출범 전 3.6%에서 임기 마지막 해인 2002년 4.7%까지 끌어올렸다. 기업의 과학기술 투자도 IMF의 직격탄으로 급감했다가 다시 늘어났다. 그해 4월 스위스 국제경영평가단(IMD)은 ‘한국의 과학 경쟁력이 세계 10위’라고 분석했다. “당시 초고속 인터넷망을 깔고 벤처 붐을 일으켜 20년간 먹고 살았다”는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의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김도연 태재아카데미·여시재 이사장은 “IMF 사태로 인해 이공계 기피와 의과대학 선호 현상이 두드러지기도 했지만 DJ가 R&D 투자를 크게 늘렸다”며 “당시 해외의 일부 과학자들이 ‘우리 대통령(총리)과 DJ를 맞바꾸자’는 농담도 했다”고 술회했다.
지난달 28일 대전 컨벤션센터(DCC) 앞. 우주 관련 연구자 등 80여 명이 피켓 시위를 벌였다. 인수위가 지역 균형 발전 차원에서 항공우주청을 경상남도에 설립하겠다고 최근 발표한 것에 대해 ‘난센스’라고 반발한 것이다. 경남 사천에 항공우주청을 설립하겠다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에 따른 정치 논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부처별·기관별로 흩어진 우주 정책과 R&D 기능을 효율화하고 미흡한 산업 육성을 해야 한다”며 “우주청이 아닌 항공우주청 방식도 걱정이 큰 데 이를 제조 기지에 설립하겠다고 하는 것은 비과학적인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출연연과 정부 기관이 밀집한 대전·세종 지역에 신설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결국 “우주 전담 기구의 목적지와 출발 시기를 정하지 못한 채 선장도 안 보이고 사공끼리 갑론을박한다(허환일 충남대 교수)”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과학기술 정책이 표류하고 있다.
윤 당선인은 지난달 29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나노기술연구원을 방문해 반도체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학생들에게 “사회 갈등과 양극화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제일 좋은 방법은 우리가 좀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다. 결국 과학기술밖에 없다”고 말했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확고히 역설한 것이다. 다만 그의 과학기술 행보를 보면 반도체를 집중 강조하면서 인공지능(AI)과 바이오를 같이 제시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는 지난달 광주 인공지능 집적 단지 내 데이터센터 공사 현장과 SK바이오사이언스를 방문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반도체·디스플레이·2차전지 등의 선도형 기술이 있지만 AI, 수소, 첨단 로봇, 사이버 보안은 경쟁형에, 양자, 첨단 바이오, 우주, 항공은 추격형에 머물러 키워야 할 전략기술이 많다. 안 위원장은 지난달 25일 ‘미래 먹거리 산업 신성장 전략’을 발표하면서 에너지, 바이오, 탄소 중립 대응, 방산과 우주항공, AI, 스마트 농업을 6대 첨단 산업으로 제시했다.
윤 당선인이 산학연 R&D의 거점이 돼야 할 출연연을 방문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번 대전 방문 때 당초 잡혀 있던 일정을 취소한 것도 뒷말을 낳았다. 대덕연구단지에는 KAIST 외에도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한국전자통신연구원·한국생명공학연구원·한국원자력연구원 등 16개의 출연연이 몰려 있다.
윤 당선인은 대선 후보 시절 ‘과학기술 추격 국가에서 원천 기술 선도 국가로 전환하겠다’고 다짐했으나 현재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게 과학기술계의 전반적 평가다. 윤 당선인은 “과학기술을 국정 운영 중심에 두고 대통령이 된다면 직접 살피겠다”고 약속하고 안 위원장에게 과학기술 공약 부분을 맡기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안 위원장의 인사 추천은 모두 수용하지 않았고 과학기술 컨트롤타워 구축에도 나서지 않으면서 자칫 공염불에 그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과학기술계에서 흘러 나온다.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는 “인수위 활동 기간 새 정부의 과학기술과 산업에 대한 비전은 접하기 어려웠고 대통령실 이전과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이슈만 부각됐다”며 “대통령실 과학기술수석 신설이 무산된 것 외에도 과기부총리제 도입 등 정부 조직 개편도 지방선거 이후로 미뤄져 기약이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 이날 과학교육 수석 신설 무산 뒤 안 위원장이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는 만큼 계속 제가 이야기해보겠다"고 했으나 장제원 당선인 비서실장은 “굳이 과학교육 수석을 만들 시점은 아니다. 그 필요성을 인정하되 좀더 지켜보면서 대통령실 필요에 따라 조금 늘리고 줄일 수 있다. 취임 후 과학기술 수석이 필요하다는 국민들 요구가 더 많아지면 저희들이 고려하겠다"고 답해 뚜렷한 온도차를 보였다. 인수위 등 차기정부 측에서 과학기술부총리 이슈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윤석열 정부가 제2의 이명박(MB) 정부가 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는 등 MB 정부 당시 퍼졌던 ‘과학기술 홀대론’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MB 정부는 노무현 정부 당시 과학기술부(과기 부총리)와 정보통신부를 폐지하고 교육인적자원부와 합쳐 교육과학기술부를 만들고, 과기부 산하 출연연 등을 지식경제부 산하로 이관해 혼선을 초래했다. 물론 윤 당선인이 과학기술 컨트롤타워로 대통령실에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ICT)을 맡는 민관합동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으나 역점 공약인 디지털 플랫폼 정부 실현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커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 위원회를 행정 기구화하지 않는 한 심의 기구를 넘는 역할과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대통령 직속으로 민관 합동 과학기술자문회의를 운용해왔으나 심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이화여대 공대 학장을 지낸 임혜숙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경험을 토대로 “과학기술디지털 부총리를 만들고 민간 전문가 중심의 국가 R&D 기획·관리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과학기술 정책과 R&D 기능이 10개 부처 이상에 나누어져 있어 강력한 통합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우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은 “과학기술이 새 정부의 국정 우선순위에서 밀리지 않을까 걱정이 큰데 대통령실에 과학기술수석을 두고 과학기술부총리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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