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유엔총회에서 연설과 퍼포먼스를 펼친 방탄소년단(BTS)은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한국실을 찾아갔다. 백자 달항아리가 가진 이지러짐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한 이들은 전통 분청(粉靑)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현대적 형태와 추상적 문양을 가미한 윤광조의 도자를 한참 들여다봤다. 오늘날 한류의 중심이 K팝이라면, 고려와 조선의 핵심 한류는 도자였으니 기막힌 조우였다. 고려 말에 등장해 조선 초에 전성기를 이룬 ‘분청’은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독창적 미감을 자랑한다.
“대학 2학년 때 외국서적만 파는 책방에서 일본책으로 ‘분청’을 처음 봤는데, 청자와 백자 둘 다 안 닮은 듯하면서도 닮았고 너무나 원초적이더군요. 1970년대만 해도 매끈하고 장식적인 도자기가 인기였지만 나는 남들이 거들떠 보지 않는 투박한 ‘분청’에 끌렸습니다. 자유스러움, 그리고 자연스러움. 이 분청의 정서를 현대적 조형언어로 보여주는 데 평생을 건다고 다짐한 지 40년이 다 돼 갑니다.”
백발의 윤광조(76)는 젊은이 같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품 수가 많지 않아 개인전을 자주 열지도 않는 그가 오는 29일까지 용산구 한남동 가나아트 나인원에서 최근작을 포함한 13점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백남준 다음으로 해외 미술관의 작품 소장량이 제일 많은 게 아마도 나일 것”이라며 “현대미술은 지나치게 자기과시적이라 색깔이나 재료로 압도하려 들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가라앉혀 흙의 본성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을 보노라면 눈보라 휘몰아치는 거친 산을 오른다는 착각이 든다. 흘러내리는 유약은 바람,눈,물길 등 자유자재로 자연을 품는다. ‘도자기는 둥글다’는 고정관념을 던져버린 1980년대부터 물레 없이 손으로 그릇을 빚는다. 꽃 피듯 벌어지고, 기울어진 듯 전진하는 형태가 탄생했다. 윤광조는 미국 유학중이던 형의 권유로 홍익대 도예과에 진학했고, 입대 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근무하며 최순우(1916~1984)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만나 더 깊은 깨우침을 얻었다.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나 일본화(化)되는 자신이 못마땅해 1년만에 귀국했는데, 김환기·이중섭의 후원자로 유명한 시인 출신 사업가 김광균(1914~1993)이 찾아와 전시를 권했다. 1976년 당대 최고의 전시공간인 신세계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 서문을 쓴 최순우 관장은 “참나무 숲에서 능이버섯이 나고 솔밭에서 송이버섯이 나듯 ‘도예’란 그 고장 풍토와 그 민족의 성정에서 그 미의 방향이 잡히기 마련”이라며 윤광조의 작품에 대해 “듬직한 양감과 아첨 없는 장식 같은 면에서 자못 한국인다운 소탈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평론했다.
안목있는 이들이 먼저 알아봤다. 장욱진(1917~1990) 화백이 도자기를 구입한 인연으로 1978년에 장욱진의 첫 도화전(陶畵展)이 열렸다. 윤광조가 빚은 순박한 정서와 신선한 형태의 그릇에 장욱진이 그림을 그렸고, 40점 정도의 작품은 개막 30분 만에 ‘완판’될 정도로 화제였다. 윤 작가는 “1994년에 전시한 호암갤러리도 출품작 전체를 구입했고,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도 내 작품을 무척 좋아했다”고 귀띔했다.
혜화동 시대를 거쳐 경기도 광주에서 작업하던 그는 1994년 경주로 옮겨갔다. 작업의 어려움에 대해 그는 “청자나 백자는 흙이 좋으면 어느정도 성공이 보장되지만 분청은 흙도 유약도 규정지을 수 없기에 ‘정답없는 싸움’을 즐겨야 한다”면서 “한번 시작하면 흙이 마르기 전에 마무리해야 해서 전화도 못받고, 화장실도 참아가며 작업하지만 흙에다 연탄재도 섞고 담궈야 할 유약을 붓고 뿌리는 과정 속에서 자유스러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거의 평생 조수 없이 작업하며 혼자 흙푸대 짊어지고 반죽하다 어깨 염증으로 고생한 그는 “2년 정도 팔이 아파 작업을 중단한 후 다시 시작한 새 시리즈는 행복감을 담아 ‘환희’라 이름 붙였다”고 소개했다. 도자기 표면에 선연한 손자국이 기쁨으로 넘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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