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방을 두드렸다. 열어 보니 김(수환) 추기경이 서 계셨다. 형님이 신학생 동생이라며 나를 소개하자 아주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셨다. 그러고는 형님 신부에게 “허 신부! 천 원짜리 몇 장 있나? 택시를 타야 하는데 차비가 없어서….” 잠시 후 김 추기경은 형님이 드린 천 원짜리 몇 장을 쥐고서 외출하셨다. 뚜벅뚜벅 걸어가던 그분의 뒷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1922∼2009·세례명 스테파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현직 언론인과 사제, 수도자들이 고인의 생존 모습과 에피소드, 추억을 담은 책 ‘우리 곁에 왔던 성자’(서교출판사)를 펴냈다. 고인은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 최초의 추기경으로 한국 종교인 가운데 가장 큰 존경을 받아온 인물 중 하나다. 탄생 100주년을 즈음해 가톨릭평신도단체인 ‘한국평협’은 김수환 추기경 시복 시성을 위한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설립을 준비 중이다.
이번 책에는 김성호 전 가톨릭방송인협회장을 비롯해 서울대교구 대변인 허영엽 신부, 남영진 KBS 이사장, 이재선 수녀, 2022시그니스 세계총회 김승월 집행위원장, 고계연 서울경제 기자,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 등 20명이 참여했다. 필자들은 김 추기경을 사랑 그 자체이자 우리 곁에 왔다 간 시대의 성자로 기억한다.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누구보다 소통을 위해 노력했고, 소탈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잃지 않았던 유쾌한 성직자로 회고한다.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추기경의 마지막 모습을 함께하고자 전국에서 온 조문객의 행렬이 명동대성당부터 명동역을 지나 회현역 남대문시장 인근까지 수 킬로미터나 이어졌다. 영하 13도까지 떨어지던 추운 날, 목도리를 두르고 모자를 쓰고 장갑을 껴도 1분도 안 돼 얼굴이 아파올 정도의 한파 속에서, 2시간 반이 걸리는 대기 시간에도 불구하고 30만 명이 넘는 국민이 추기경을 조문했다.”
김 추기경은 종교의 벽을 넘어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 국민에게 희망과 감동, 위로를 주었다. 생전 그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공동선 추구를 위한 교회 역할을 강조했다. 그 신념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불의와 타협을 거부해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인권 옹호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또 민족의 화해와 북한 교회를 위해서도 헌신했다.
“김 추기경이 진지하게 말씀하실 때는 정말로 온 세상이 진실해지는 느낌이었다. 1987년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군 추모미사 때 당국을 향해 외친 말씀은 모두가 기억하고 있다. “공권력을 투입하려면 지금 나를 밟고 가라.””
하지만 필자들은 그가 좌측도, 우측도 아닌 오직 하나님과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려고 노력했다고 기억한다. “김 추기경은 평화방송·평화신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1970~19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려고 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에는 보수 쪽의 비판을 받았고, 막상 민주화가 이뤄진 이후에는 진보쪽의 비판을 받는 모습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이 김 추기경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김 추기경은 한 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는데 평가하는 사람들의 잣대가 움직인 것 아닌가 합니다.”
그는 상황과 분위기에 맞게 소탈한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휴머니스트기도 했다. 강의나 강론도 늘 유머로 시작했다. “김 추기경은 농담도 잘 하셨다. ‘삶은 계란’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지방 어느 대학에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강의를 하러 열차를 타고 가시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던 차에, 마침 통로로 지나가던 간식 판매원이 “삶은 계란이요, 삶은 계란~” 하기에 귀가 번쩍 뜨이시더라고 했다. 그래서 그날 강연의 리드는 “여러분 삶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삶은 계란입니다”로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텍사스에 오셨던 그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김 추기경의 탁월한 유머 감각이다. 신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스갯소리를 하셨는데, 영어와 혼합된 우리말 사투리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미국에 이주해서 사는 경상도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이 외출해서 집에 돌아왔는데 열쇠가 없어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방 안에서 부인이 “훈(Who+ㄴ)교?(누구인교?)”하니까, 밖에 있던 남편 왈, “미(me)랑께(나랑께)”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김 추기경은 평생 동안 가난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는 구겨진 바지를 입고 택시비가 없어 비서 신부에 꾸고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선종할 당시 고인의 이름으로 돼 있는 통장은 아예 없었고 비서 수녀가 대신 관리하는 통장에 1000만원도 채 안 되는 돈을 남겼다. 이마저도 장례식장에 온 사람들에게 묵주를 사서 나눠달라고 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겸손한 소통의 달인이기도 했다. 1987년 민주화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들이 경찰에 쫓겨 명당성당 구내로 들어와 농성을 벌일 때였다. 학생들은 코스트홀 대회의실을 점거한 채 외부인 출입을 막고 농성을 풀 것인지, 이어갈 것인지 격론을 벌였다. 김 추기경은 그 회의실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일부 신자들은 학생들이 허락도 없이 무작정 성당을 점거하고 추기경님을 못 들어오게 한다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엷은 미소를 띠시고 족히 반 시간 넘게 기다리시다 토론이 끝나가자 들어가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김 추기경은 언론인의 역할이 성직과 다르지 않다고 보고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언론인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추기경이 되기 전에는 그 자신이 언론인기도 했다. “가톨릭신문사 ‘사장 김수환’은 직접 기사를 쓰고, 외신을 번역해 다듬고, 편집 기획을 하고, 사설까지 썼다. 1951년 사제품을 받은 젊은 목자는 1956년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만난 은사 요제프 회프너 신부(1969년 추기경 서임)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 사회학’에 대해 밝게 눈떴다.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기초로 한 인간관과 국가관 등을 더욱 확실히 정립한 이 젊은 목자는 유학을 마치고 1964년 6월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사) 사장 소임을 맡았다.
늘 바보처럼 웃는 얼굴의 김 추기경. 그는 말년 투병 중에도 자신의 고통을 참으면서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했고 주변 사람들을 배려했다. “2008년 12월 24일 저녁. 그날 강남성모병원 로비에서 봉헌된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때 나는 살아계신 추기경님을 마지막으로 뵐 수 있었다. 휠체어에 온몸을 의지한 채 미사에 참여한 추기경…. 추기경께서 비서 수녀님을 통해 취재 차 나온 내게 정성껏 포장된 쿠키 세트를 선물로 주셨다. 그 쿠키가 너무나 소중해 유통기한이 다 되도록 보관만 하다가 마지막에서야 사랑하는 가족들과 나눠 먹었다. 그날 이후 추기경께선 혜화동 주교관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셨다. 당신께서 그토록 평생 원하셨던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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