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인공지능(AI), 바이오, 빅데이터, 양자 기술, 우주 등에서 우리보다 과학기술 수준이 높습니다. 반도체도 수년 내 중저가 분야에서 우리를 추월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환경·사회·지배구조(ESG)의 가치를 연결 고리로 미국·유럽과의 협력을 강화해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반도체·정보통신기술(ICT)·ESG 전문가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 인수위원을 지낸 유웅환 전 SK텔레콤 부사장은 16일 진행된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미국이 경제 안보 차원에서 반도체 등 전략 기술을 키우기 위해 ESG 같은 글로벌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윤석열 정부 5년간 100만 개의 질 좋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며 성장 동력 확충을 위한 규제 혁파, 노동 개혁, 교육 혁명, 산학연 연구개발(R&D) 대혁신, ESG 확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선 반도체 전문가로서 중국 ‘반도체 굴기’의 경쟁력을 어떻게 보는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의 추격세가 매섭다. 로엔드(중저가) 분야에서 3~5년 내 우리가 중국에 따라잡힐 수 있다고 본다. 중국은 DDR4·LPDDR5라는 D램 반도체를 이미 양산하고 있다. 한국 메모리 반도체의 경쟁력은 초미세 공정 기술에서 나오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더 이상 오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우리는 메모리에 비해 뒤처진 비메모리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통신·모빌리티·바이오·양자·6세대(6G) 등 타 산업과의 융복합도 중요하다.
-4차 산업혁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방안은.
△수년 내 반도체 분야에 미국은 62조 원, 유럽연합(EU)은 71조 원, 중국은 170조 원을 투자한다. 차세대 반도체 산업 가운데서도 자율주행·로봇·스마트의료 등을 위한 초저지연 반도체를 다품종 소량 생산하는 게 핵심이다. 글로벌 기술 제휴를 늘리고 중소 팹리스(반도체 설계·개발)를 육성하고 공공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를 운영해야 한다.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R&D 활성화도 중요하다. 설비투자 세액 공제도 확대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반도체 인력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 현재 파운드리·팹리스 강국인 대만은 20만 명 이상의 설계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제가 인수위에서 새 정부의 반도체 기술 인력 10만 명 양성 계획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설계 실무자 7만 명, 아키텍트(설계) 및 R&D 인력 3만 명 육성을 위한 학부·대학원 정원 확대가 들어가 있다.
-반도체 기술 인력 양성은 질 높은 일자리 창출 방안이 될 수 있겠다.
△반도체 기술 인력 10만 명 중에는 석·박사급의 설계 인력 외에 이공계 학부 졸업생 수준이 감당할 수 있는 설계 실무 인력도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무르익을 ESG 분야에서도 좋은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 인수위에서 활동할 때 17개 부처의 ESG 정책을 점검한 결과 산업통상자원부와 중소벤처기업부에서 5년 동안 ESG 전용 자금 60조 원을 확보하면 100만 개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지난해 59조 원 규모의 ESG 민관 정책금융도 2030년에 310조 원으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지렛대로 삼아 좋은 일자리를 추가로 만들 수 있다.
-다른 일자리 창출 아이디어도 있는가.
△코로나19 사태 전 연 3만 명 이상의 30세 이하 청년이 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다. 하지만 비자 성격상 식당에서 접시 닦고 농촌에서 일하는 데 그쳤다. 전공에 따라 현지 기업에서 인턴십을 할 수 있고 실력이 있으면 정규직으로 채용될 수 있게 정부가 나서야 한다.
-차세대 반도체·바이오·6G·양자·우주 분야의 국가 전략 기술을 경제 안보 차원에서 키워야 할 텐데.
△미국·중국·EU·일본 등이 모두 그렇게 한다. 우리가 빨리 경제 안보 컨트롤타워를 만들고 미국 실리콘밸리처럼 실질적인 산학연 협업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은 긴 호흡으로 때로는 허무맹랑해 보이기도 하는 독창적 연구를 유도한다. 우리도 그 모델을 참고해 과학기술 개발자들의 창의성을 일깨워야 한다.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어느 나라도 무시하지 못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미국·EU와 과학기술 협력을 늘리면 중국과도 사안별로 협력할 여지가 생길 것이다.
-20~22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한국과 미국이 과학기술 동맹 차원에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은가.
△한국과 미국이 공감할 수 있는 ESG 기반으로 반도체·배터리 등 전략 기술의 R&D와 인재 양성, 공급망 재편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야 한다. 미국 주도의 다자경제협의체인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도 적극 참여해 공급망 협력 등에서 우리 입장을 선제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이미 우리 기업들은 미국에 첨단 전략 산업 분야 공장 신설 등 많은 투자를 약속했다. 지난해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과학기술 동맹의 단초를 마련했는데 이번에 좀 더 고도화해야 한다.
-ESG를 매개로 한 한미 간 협력 확대는 중국 견제 카드로도 쓰일 수 있겠다.
△그런 측면도 있다. 중국은 석탄 발전 비중이 56~57%나 될 정도로 높고 탄소도 많이 배출한다. 중국은 경영 측면에서도 특허 침해나 정보 빼내기, 불투명 경영 등 ESG 원칙을 위배하는 경우가 많다.
-EU가 내년부터 탄소국경세 시범 도입에 들어가고 미국도 이를 적용하게 될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중국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그렇다. ESG가 기후변화와 팬데믹 문제 해결의 열쇠일 뿐 아니라 일자리와 성장 동력 측면에서도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수위에서 글로벌 ESG 경쟁력 향상을 위해 범정부 ESG 컨트롤타워를 제안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국가적으로 ESG 경쟁력을 높이려면.
△신산업과 일자리를 키우는 디지털 기반의 ESG 혁신 성장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정부의 공공 데이터, 특허 등 지식재산(IP)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ESG 금융 활성화도 필요하다. 그래야 기업들이 융복합 R&D를 활성화할 수 있다. 기업들이 규제보다 인센티브 중심의 ESG 정책을 원하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실리콘밸리에서 10년간 일한 경험으로 볼 때 산학연의 R&D 대혁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 R&D 생태계를 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1차관과 제2차관 사이에도 장벽이 높다. 나눠먹기식 R&D도 많다. 기존 틀을 깨는 창의적 연구 아이디어를 장려하는 구조가 아니다. 산학연 협업도 부족하다. ‘현재 국내 산학연 연구원이 50만 명 수준인데 장기적으로 100만 명 정도로 키워야 한다’는 얘기를 안철수 전 인수위원장과 나눈 적이 있다. 다양한 분야의 연구진이 폭넓게 어울리며 융합 연구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산학연의 협업과 IP 전략 고도화가 핵심 과제인데.
△업종 간 경계가 무너진 시대에 큰 성장 모멘텀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자동차·반도체·통신 등이 협업하면 승수 효과가 나는데 잘 안 된다. 정부가 R&D 자금을 지원할 때 대·중소기업 협력과 산학연 협력을 장려해야 한다. 아직 IP를 존중하는 문화도 아닌데 바꿔야 한다. 제가 기업에 근무할 때 220명의 연구원이 있었는데 연 100여 편의 논문과 100여 편의 특허에 관행적으로 상급자의 이름을 함께 넣더라. 한 번은 14나노 기술과 관련한 좋은 논문에 제 이름도 같이 넣자고 하길래 그런 고정관념은 바꾸자고 했다.
-새 정부에서 규제·노동·교육 개혁이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데.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다. 신뢰가 없으니 할 수 있는 것만 규정하는 식으로 규제가 늘어나게 된다. 자유롭게 수영을 해야 하는데 뒷다리를 잡는 식이다. 신산업, 미래 산업은 중장기적으로 할 수 없는 것만 규정하는 네거티브 규제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 노동 개혁도 신뢰의 문제다. 정부가 사회 안전망과 맞춤형 직업교육 시스템을 잘 구축하고 기업이 인력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교육 혁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새 정부가 민간 위주의 경제 운용 원칙을 강조하면 중소·벤처기업이 소외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는데.
△미국과 한국 대기업에서 각각 10년가량 일했는데 인수위에 합류하기 전 중소·벤처기업의 성장과 ESG를 키우는 일을 했다. 이를 통해 대기업의 혁신 동력도 커진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중소·벤처기업이 힘들게 키운 기술과 인력을 헐값으로 빼내서는 안 된다. 반도체 분야에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만 있어서는 안 되고 중소 팹리스와 소재·부품·장비의 경쟁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퍼스트 무버 DNA’를 일깨우고 혁신 인재를 양성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우리는 시스템·리더십·기술·교육·실력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열심히 하는 자세나 청년들의 역량은 미국보다 더 훌륭하다. 대학 진학률도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각각 25%와 17% 정도인데 우리는 80% 가까이 되지 않는가. 충분히 퍼스트 무버가 될 수 있다. 다만 개인의 경쟁력이 조직의 성과로 이어지지 못해 안타깝다. 청년들이 코인이나 주식에 빠지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새 정부의 과학기술 컨트롤타워 구축 미흡 등으로 과학기술 홀대론도 나오는데.
△인수위가 제시한 110대 국정 과제 중 상당수가 과학기술을 중시하고 그것을 토대로 성장 동력을 찾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이렇게 국정이 운영된다면 과학기술 홀대론 얘기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He is…
1971년 인천에서 태어나 광운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전기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인텔에서 10여 년 동안 엔지니어·수석매니저로 일하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상무와 현대자동차 연구소 이사를 지냈다. 2018년 SK텔레콤에 영입돼 오픈콜라보센터장·SV이노베이션센터장·ESG혁신그룹장(부사장)을 역임했다.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캠프 영입 1호로 민주당 선대위 일자리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최근 윤석열 정부의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 인수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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