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전 8시 40분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첫 단독 회동을 마친 뒤 기자들 앞에 섰다. 추 부총리와 기자들 간 질의응답이 오가는 동안 이 총재는 입을 열지 않았다. 기준금리 인상 관련 질문에만 “금통위원들과 상의 전이라 드릴 말씀이 없다”고 짧게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반전은 마지막 질문에서 나왔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b·연준)의 금리 인상 평가와 한미 금리 역전에 관해 묻자 이 총재는 작심한 듯 빠르게 답변을 늘어놨다. 이 총재는 “우리나라가 50bp(0.50%포인트) 인상을 고려할 수 있냐는 건 4월까진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앞으로 물가가 얼마나 더 올라갈지 종합적으로 데이터를 보면서 판단할 시점”이라며 “5월 금통위 상황과 7~8월 경제와 물가 상황을 봐야한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현장 분위위가 달라졌다.
이어 이 총재는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0.75%포인트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데이터가 불확실한 상황이기 때문에 빅스텝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며 “우리나라 물가와 성장이 어떻게 변할지를 조금 더 봐야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후속 질문이 쏟아졌지만 이 총재는 이 말을 끝으로 곧장 자리를 떴다.
이 총재 발언에 금융시장은 물론이고 한은마저 깜짝 놀랐다. 먼저 한은은 지금까지 빅스텝으로 금리를 올려본 적이 없다. 금리를 내릴 때는 과감하게 내려도 올릴 때는 경제·금융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항상 베이비스텝(0.25%포인트)으로 접근했다. 심지어 빅스텝으로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낸 금통위원도 없었다. 금리를 연달아 올리는 것도 2008년 7~8월 이후 처음일 만큼 금리 인상에 신중한 모습이다.
한은 총재가 빅스텝 가능성을 열어둔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금통위를 불과 열흘 남겨 둔 시점이라는 점에서 더욱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빅스텝에 대한 이 총재 입장도 불과 한 달 만에 크게 달라졌다. 이 총재는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한국은 한 번에 0.25%포인트 넘게 큰 폭으로 기준금리를 조정할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답변한 바 있다.
금융시장도 충격받은 모습을 보였다. 국채 3년물 금리는 이날 오전 한때 전 거래일 대비 0.17%포인트 상승하며 연 3.082%까지 올랐다. 이후 상승 폭을 줄이며 연 3.046%로 마감했지만 전일(2.911%) 대비 크게 높아졌다. 외환시장 역시 출렁거렸다. 원·달러 환율은 총재 발언으로 장중 1276원까지 떨어졌으나 중국 경기 부진 우려에 1286원 30전까지 오른 뒤 결국 1284원 10전에 마감했다. 구두개입성 발언에도 반응이 없던 외환시장이 총재의 깜짝 발언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총재가 의도하지 않은 발언을 한 것 아니냐는 반응까지 나왔다. 이날 회동 직후 기자 브리핑이 예정돼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전에 질문이 조율된 상태도 아니었다. 정책 부서와 발언 수위를 협의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한은은 이 총재 발언이 원론적 입장이라며 시장 달래기에 나섰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물가와 관련한 불확실성이 지속될 수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겠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며 물가 전망의 불확실성이 매우 큰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총재 발언이 계획된 것이란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물가 관리를 위한 경각심 차원에서 미리 준비한 메시지를 던졌다는 것이다. 한미 금리 역전을 50bp 이상 허용할 것이냐는 질문에 한은 빅스텝 가능성으로 답한 만큼 미리 생각하고 있던 말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시장 반응을 살피려는 의도도 감지된다. 실제로 시장에서는 이 총재가 실제로 빅스텝을 단행하기보다는 긴축 행보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한 발언으로 해석했다. 우려할 만큼 과도한 시장 충격도 없었다.
전임 이주열 총재는 이창용 총재와 전혀 다른 화법을 구사했다. 정책 부서 등과 철저하게 사전에 조율된 발언만 시장에 내보냈다. 금리 인상 신호도 단계적으로 제시해 시장에 충격을 최소화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점진적’과 ‘적절히’다. 지난해 10월 한은은 통화정책방향 의결문 문구를 ‘점진적 금리 인상’에서 ‘적절히 금리 인상’으로 바꿨다. 점진적이라는 문구를 두고 시장에서 한은이 금리를 한 번 올리면 한 번 쉰다고 해석하자 이를 ‘적절히’로 바꿔 ‘금리를 연속해서 올리지 않는다’라는 도식적 사고를 의도적으로 깨드렸다. 그리고 한은은 지난해 11월과 올해 1월 연속 금리를 올렸다. 이 전 총재의 소통 방식은 이토록 조심스럽고 세밀한 측면이 있었다. 총재가 바뀐 만큼 달라진 화법에 시장과 한은 모두 적응할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한은 직원들에게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소통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만큼 몸소 시범에 나섰다는 해석도 나온다. 한 한은 직원은 “한은 직원 대부분이 평생 모범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기존의 틀을 깨뜨리지 않으면 변하기 힘들다”며 “이 총재가 먼저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총재는 지난달 25일 취임 후 처음 출입기자단과 만난 자리에서도 “저도 소통을 많이 하겠지만 한은 임직원들이 자기가 만든 연구물을 가지고 바깥에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며 “경험이 적다 보니 소통하면서 실수가 생기고 많은 비난을 받을 가능성도 있는데 실수를 넘어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신경을 써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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