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6년 가까이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등 국가전략기술 유출 시도를 적발해 사전에 막은 피해 예상 금액만도 약 21조 4000억 원(국가정보원 2022년 통계)입니다. 잡지 못한 것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일 것입니다.” (정상조 국가지식재산위원회 공동위원장)
국정원이 2017년부터 올해 2월까지 총 99건의 산업기술 해외 유출 사건을 적발해 21조 원 이상의 피해를 예방했다고 밝혔으나, 실제 적발 건수가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21년 8월까지 국가 핵심기술 35건을 포함해 총 112건의 산업 기술이 해외로 유출됐다. 유출처는 중소기업(67건), 대기업(36건), 대학·연구소(9건) 등의 순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처벌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법원행정처의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0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1심 판결을 받은 14건 중 실형은 없었고 집행유예 10건, 무죄 3건, 벌금형 1건 등이었다. 2016~2020년의 경우 1심 판결 49건 중 실형은 3건에 그쳤다. 국회에서 산업 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과 손해배상액 강화, 신상 공개를 담은 법 개정안이 몇 건 발의돼 있으나 통과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반면 해외에서는 핵심 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흐름이 뚜렷하다. 실제 중국의 반도체 등 ‘과학 굴기’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때부터 본격적으로 핵심 기술 유출에 대한 단속을 대폭 강화했다. 반도체 장비, 소프트웨어 수출 시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핵심 기술 관련 기업들에 대한 중국의 인수합병(M&A) 시도에도 제동을 걸었다. 중국의 만인계획에 관련됐으나 신고를 안 한 교수들에 대한 법적 처벌에도 나섰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 대학에 있는 중국 석·박사생들은 스파이나 마찬가지”라는 극언을 하기도 했다. 이런 기조는 조 바이든 정부 들어서도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김덕수 한양대 기계공학과 교수는 “미 공군에서 연구 과제를 수주한 게 있는데 중국 학생을 연구실에 받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다”고 전했다. 반도체 산업 재기에 나서는 일본과 현재 반도체 분야에서 우리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대만도 산업기술 해외 유출자에 대한 처벌 강화에 나섰다. 심지어 대만은 핵심기술 유출을 ‘경제 간첩죄’에 넣기로 했다. 이 모두 기술 패권 시대에 국가전략기술이 경제안보 차원에서 국가의 생존과 미래 성장 동력을 좌우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국가전략기술 유출이 경제안보를 크게 위협한다는 점에서 새 정부가 전략기술 인재 관리와 해외 인재 유치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연구개발(R&D) 과정에서부터 기술 탈취·유출 방지에 세심히 신경 쓰고 지식재산(IP)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조언도 내놓는다.
물론 윤석열 정부도 기술 보호와 전략적 R&D 기획을 위한 산업 기술 빅데이터 플랫폼(Tech Value Chain·TVC)을 2024년까지 구축하기로 하는 등 핵심 기술 보호 의지를 나타내고 있으나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TVC에는 동맹국 중심으로 공동 R&D 플랫폼(Tech-7)을 구축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새 정부는 필요하면 국가 핵심기술 등의 해외 출원 금지와 비밀을 관리하는 비밀특허 제도도 도입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올해 반도체 등 73개 핵심 기술, 내년에는 방산 기술까지 특허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방침이다. 경찰의 기술 유출 수사 범위 확대 및 인력 확충, 유출 범죄로 얻은 재산 몰수, 핵심 인력의 해외 취업 알선·중재 처벌 등도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핵심 인재가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도체 전문가인 유웅환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수위원은 “핵심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은 물질적인 보상도 원하지만 산학연 조직 안에서 계속 성장하고 지원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연구자로서 꿈을 펼칠 수 있게 정부와 산학연이 문화·생태계를 갖추고 리더가 연구자들에게 자긍심과 로열티(충성심)를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유 전 인수위원은 산학연의 핵심 연구원들에 대한 국가적인 관리와 글로벌 인재 유치에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과는 탄소중립·균형성장·공정경제(ESG)의 가치를 공유하며 과학기술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 연구자들은 한국의 단기 성과 강조 문화와 연구 관련 규제를 혁신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 대기업의 인공지능(AI) 핵심 연구원은 “AI 연구에서 중국은 빅데이터가 엄청나고 규제가 덜해 기회가 많지만 우리는 빅데이터는 부족한데 연구 관련 규제는 많다”고 지적했다. 또다른 대기업 AI 핵심 연구원 역시 “연구자에게 단기적인 R&D 마인드로 접근하라고 주문하는 경우가 많다”고 꼬집었다.
특허 등 IP 전략 강화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도 많다. 천세창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융합혁신촉진옴부즈만은 “산업 기술과 영업 비밀 보호를 위한 수사 역량을 키우고 법·제도 정비에 나서야 한다”며 “산학연의 IP 전략 강화도 핵심 기술 보호, 인재 유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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