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5년 간 발생한 국가핵심기술 유출 사건 10건 가운데 9건이 반도체·디스플레이·자동차·조선·정보통신·전기전자 등 6대 국가 기간산업에 집중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분야에서 중요 기술이 연이어 빠져나가고 있으나 정작 적발하고도 수사·재판에만 4년 이상이 소요되고 있어 산업·경제계에서는 ‘재판에서 이겨봐야 결국 남는 건 헌기술’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기술 안보를 위한 인력 확충과 수사·재판의 전문성 향상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29일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2017년부터 올해 2월까지 중국 등 해외로 유출된 국가핵심기술은 34건에 달한다. 이 가운데 반도체·전기전자·디스플레이·자동차·조선·정보통신 등이 31건으로 전체의 91.2%를 차지했다. 조선업의 경우 5년 동안 해외로 유출된 기술 8건 중 7건이 국가핵심기술이었다. 같은 기간 반도체·전기전자 분야에서도 각각 6건과 5건의 국가핵심기술이 유출됐다. 이는 6대 분야 전체 유출 건수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다. 디스플레이·자동차·정보통신 분야에서도 각각 6건, 4건, 3건의 국가핵심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국가핵심기술이 주로 유출된 곳은 대기업이었다. 전체 34건 가운데 21건이 대기업에서 유출됐다. 이어 중소기업(10건)과 대학·연구소(3건) 순이었다.
문제는 핵심기술유출이 해마다 지능·점조직화되고 있지만 수사·재판 전문성은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A사의 경우 산업기술 유출 사건이 발생한지 5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히 항소심을 진행하고 있다. 핵심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는 걸 적발하고도 실제 처벌까지 최소 4~5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돼 기업들은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법조계 안팎에서 산업기술유출 사건에 대한 법원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산업기술유출 사건은 고도의 전문성과 재판 경험이 필요한 분야로 꼽히지만 관련 형사사건을 다루는 전담재판부가 있는 법원은 서울중앙지법, 수원지법 등 일부에 불과하다. 대형 로펌의 한 산업기술유출 담당 변호사는 “전문법원인 특허법원 소속 판사들의 심리를 보면 법리나 기술적인 내용들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다는 인상을 받지만 대부분의 법원에는 전담재판부가 없어 기술유출 사건을 일반 형사사건들과 함께 다루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지적했다. 이어 “평소 살인이나 절도·사기 등 사건을 맡다가 영업비밀 침해 사건이 배당되면 판사 입장에서는 심리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며 “기술적인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검찰이 제기한 공소사실이 얼마나 가슴에 와닿겠나”라고 덧붙였다.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 측의 발언권이 제한되는 점도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작용한다. 사건을 수사한 검사가 직관이라도 하면 그나마 낫지만 공판검사만 공소제기에 참여할 경우 재판이 자칫 변호인의 조력을 받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어서다.
게다가 수사·기소를 맡는 검찰 내 전문 수사 부서도 수원지검 방위사업·산업기술유출전담수사부가 유일하다. 해당 부서에서 산업기술유출을 전담하는 수사 인력은 검사·수사관 등 17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나마도 혐의 입증이 쉽지 않아 야근이 잦은 탓에 기피 부서로 여겨지고 있다는 게 검찰 관계자의 귀띔이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산업기술 유출은 전국에서 발생하고 있으나 변리사 등 전문인력을 갖춘 전담부서가 한 곳이라 지방의 경우 해당 검찰청 형사부가 수사를 맡는다”며 “지방검찰청 형사부는 살인·강도·사기 등 경찰에서 넘어오는 사건도 많은데다 산업기술유출이 꺼리는 사건이라 전문성 있는 빠른 수사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결국 국가 경제와 직결되는 산업기술유출 범죄를 적발하고도 수사·재판에서 일벌백계하는 형사·사법 안전망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셈이다. 전문가들은 전문 인력 확보와 더불어 전담 부서 설치 확대 등으로 수사·재판의 질을 한층 높여야 국가핵심기술이 중국 등 해외로 빠져나가는 사건이 줄어들 수 있다고 조언한다.
지식재산권 전문인 이석희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는 “국내 기업에서 승진에 실패한 이들이 해외 기업으로부터 영입 타깃이 되고 있다”며 “유출되는 곳이 대부분 중국 기업이나 최근에는 유럽·동남아 등지에서 신생 배터리 업체들이 생겨나면서 국내 2차전지 부분 기술유출까지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단순한 인력이동·재취업과 기술유출은 경계가 모호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검찰과 법원이 산업기술유출 사건을 판단함에 있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며 “전문인력 확보는 물론 수사와 재판부의 신중하고 깊이 있는 심리가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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