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전기차·2차전지 등 핵심 산업에서 주요 경쟁국은 민관이 손잡고 기술력을 확보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정부가 과감한 제도적·재정적 지원으로 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해주면 기업은 아낌 없는 투자를 통해 경쟁력을 한껏 끌어올리는 구조다. 국내에서도 정부 차원의 인력 양성과 인센티브 제공 등을 통해 기업의 투자 효과를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6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경쟁국을 압도적인 격차로 따돌리고 글로벌 파운드리 1위로 자리 잡은 대만의 TSMC가 대표적이다. 대만 정부는 TSMC가 있는 최대 규모 첨단 산업단지인 신주과학공업단지를 통해 회사의 성장을 지원해왔다. TSMC는 정부가 산학 연계 모델을 통해 육성한 인재를 확보하고 법인세 면제, 연구개발(R&D) 보조금 등 혜택을 받으며 기술 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TSMC는 2020년 R&D 투자를 전년 대비 26% 늘린 데 이어 지난해에는 다시 20% 증가한 45억 달러를 투자비로 썼다. 올해 예정된 반도체 공장 신설 계획도 6건에 달한다.
미국도 정부와 기업이 함께 반도체 산업 육성에 뛰어들었다. 미국 하원에서는 3월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증대를 목적으로 520억 달러(약 62조 원)를 투입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미국 경쟁법안(America COMPETES Act)’을 통과시켰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 역시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제조업 강화를 위해 의회에 법안 통과를 압박하고 나섰다.
정부와 의회의 지원에 힘입어 인텔은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기업 중 가장 많은 금액을 R&D에 투자했다. 지난해 인텔의 R&D 투자액은 152억 달러(약 19조 3000억 원)로 삼성전자(65억 달러)의 두 배를 뛰어넘었다. 인텔은 파운드리 부문에서도 공격적 투자를 통해 삼성전자를 위협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지난달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450조 원의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기업의 투자를 뒷받침할 제도적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8월 시행을 앞둔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반도체특별법)’에도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 학과 정원 확대와 시설 투자에 대한 최대 50%의 세액공제 등 기업들의 요구 사항이 상당 부분 배제됐다.
연평균 30%의 성장률이 예상되는 전기차 시장에서도 기업들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토대로 글로벌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미국은 ‘친(親)전기차’ 정책을 펼치는 바이든 행정부의 기조에 따라 전기차 충전 인프라 확충에 6조 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하기로 했다. 전기차 배터리 산업 발전에 4조 원을 투자한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이에 제너럴모터스(GM), 포드, 스텔란티스 등 완성차 업체들은 앞다퉈 공격적 증설에 나서고 있다.
전 세계 1위 전기차 배터리 업체인 중국의 CATL은 정부의 든든한 보조금 정책을 등에 업고 내수 시장에서 벗어나 미국과 유럽 등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CATL은 설립 초기부터 정부로부터 1억 달러에 이르는 보조금을 받았으며 주요 광물 광산을 인수할 때도 지방정부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CATL은 올해 가동을 앞둔 독일의 첫 해외 배터리 공장에 이어 북미 투자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핵심 산업이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정부가 할 역할이 있고 기업이 할 수 있는 부분이 따로 있다”며 “원자재 같은 경우 개별 기업이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어 정부가 해외와 협력해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업의 R&D, 시설 투자에 대한 충분한 인센티브와 보조금이 뒷받침돼야 기업으로서도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기술 개발을 이어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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