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를 일상 운동으로 한다는 것은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했던 일이죠. 젊은 골퍼들이 좀 더 자유롭고 즐겁게 골프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프로 골퍼에서 골프웨어 수장으로 인생 제2막을 연 인물이 있다. 주인공은 코오롱FnC의 자회사 슈퍼트레인을 이끄는 김윤경(50) 대표다. 20~30대를 겨냥한 토종 브랜드 ‘왁’부터 럭셔리 브랜드 ‘지포어’까지 그가 론칭한 골프웨어는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진출하며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다. 다채로운 컬러로 젊은 골퍼들의 마음을 훔친 왁은 지난해 전년 대비 2배의 매출 신장률을 기록하며 400억 원대 브랜드로 성장했다. 중국·일본을 찍고 올해는 미국에도 깃발을 꽂았다.
골프웨어 열풍의 중심에 있는 김 대표를 최근 서울 강남 가로수길 왁 팝업스토어에서 만났다. 프로 골퍼 출신의 패션 업계 최고경영자(CEO)라는 독특한 이력에 걸맞게 건강미와 남다른 패션 감각이 인상적이었다. 김 대표는 1994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에 정회원으로 입회한 프로 골퍼다. 골프 자체가 낯설던 1980년대 중학교에 입학해 부모의 권유로 처음 클럽을 잡았다. 현역 시절 밤낮으로 연습에 매진하며 각종 대회에 참가했지만 아쉽게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25세의 나이에 은퇴를 결정했다.
김 대표는 “모든 운동선수가 잘할 수는 없다. 그리 잘 치는 선수가 아니었다”고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이어 그는 “골프를 정말 좋아해서 치는 사람도 있지만 본업이 되면 매주 평가를 받아야 한다.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냉혹한 현실에 골프장을 떠난 김 대표는 미국행을 택했다. “다시는 골프 시장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게 당시 다짐이었다. 대신 골프 외에 자신이 잘하는 것을 찾아야겠다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가구 회사 마케터였다.
사실 김 대표는 현역 시절 남다른 패션 센스로 먼저 이름을 날렸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골프웨어는 패션이 아닌 운동복에 가까웠다. PK 셔츠에 반바지, 투박한 루즈핏이 대표적인 골프장 패션이었다. 색상도 아웃도어만큼이나 다채로웠다. 하지만 김 대표는 ‘나만의 길’을 택했다. 반팔과 반바지는 흰색으로 통일해 ‘올 화이트’로 입는 대신 빨간색 벨트로 포인트를 줬다. 양말과 머리띠 등 액세서리도 적극 활용했다. 김 대표는 “당시에는 골프 인구가 적었던 만큼 격식을 갖춰야 했는데 일종의 룰을 깨고 싶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패션 센스는 ‘뜰 것 같은’ 가구 디자인을 찾아내는 능력으로 발휘됐다. 경쟁 선수들, 코치 및 스태프들과 동고동락했던 시간들은 탁월한 영업력으로 제 모습을 찾았다. 10년간 가구 마케터로서 경험을 쌓은 김 대표는 한국에 돌아와 유명 카페를 브랜딩하는 등 외식 분야에서도 활약했다. 그러다 2012년 골프웨어 브랜드 ‘엘로드’를 맡으며 코오롱FnC에 입사했다. 김 대표는 프로 골퍼 경력을 살려 골프웨어의 현실적인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점프슈트 골프웨어 안에 멜빵 형식의 끈을 덧대 화장실에서도 옷을 편하게 벗을 수 있도록 해보거나, 테니스복처럼 골프공을 넣을 수 있는 속바지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골프와의 연을 끊겠다’고 다짐했던 김 대표가 골프웨어 업체의 수장을 맡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김 대표의 심경 변화를 이끈 것은 20~30대 젊은 골퍼들이다. 골프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공식 종목으로 채택됐지만 대중 스포츠로서의 인지도는 낮았다. 당시 김 대표가 골프백을 메고 버스를 타면 나이 지긋한 어른들로부터 “어린 학생이 낚시도 하냐”는 질문을 늘 받았다. 지금과 달리 20대 젊은 골퍼들은 주말에 골프장 예약이 어려웠다. ‘어른’들이 골프를 치는데 ‘아이’들이 감히 얼씬거리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여성 골퍼들은 클럽하우스나 그늘집 출입 자체가 어려웠다고 한다.
김 대표는 “스트레스 없이 재미로 골프를 칠 수도 있다니. 제가 골프를 쳤던 때와 너무 다른 시대를 보고 놀라웠다”며 “정형화된 브랜드가 아닌 젊은 골퍼들이 더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골프웨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발을 들였다”고 말했다. 왁의 브랜드명에도 김 대표의 염원이 녹아 있다. 왁(WAAC)은 ‘반드시 승리하다(Win At All Costs)’의 약자다. 핏도 몸맵시가 드러나는 것 뿐만 아니라 박시하거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실루엣을 추구한다. 현재 국내 골프웨어들은 여성의 몸맵시를 드러내는 데 치우쳐 있다는 게 김 대표의 지적이다. 대신 신발·액세서리와의 조화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살리는 데 방점을 찍었다. 다만 김 대표는 젊은 골퍼들에 대한 조언도 덧붙였다. 그는 “기본적인 에티켓은 지켜야 한다”며 “그린을 손상시키는 등 코스를 해치거나 타인의 플레이를 방해하는 행동은 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오롱FnC의 골프웨어 양대 축인 ‘지포어’의 경우 국내에 론칭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었다. 지포어는 2011년 미국에서 탄생한 브랜드다. 국내에는 2020년 발을 들인 신생 브랜드이지만 럭셔리 포지셔닝으로 주요 백화점 골프웨어 카테고리 매출 상위권을 기록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 김 대표는 지포어의 컬러 골프 장갑을 눈여겨봤다. 김 대표는 “보통 색채가 높으면 퀄리티가 낮을 수밖에 없다”며 “지포어는 고급 가죽 소재를 사용해 12가지의 색을 장갑에 잘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지포어 본사는 판권을 원하는 업체에 대해 까다로운 심사를 진행하기로 유명하다. 김 대표는 지포어를 ‘럭셔리 골프웨어를 넘어 명품 브랜드와 견줄 수 있는 브랜드로 만들겠다’며 설득한 끝에 지포어의 국내 판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젊은 골퍼들에 대한 관심은 온라인 강화 전략으로 이어졌다. 20~30대 골프 인구가 늘어날수록 ‘다음 날 당장 필요한 골프공을 새벽배송으로 받아보는 서비스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게 김 대표의 구상이다. 첫 결과물은 2020년 론칭한 골프 전문 온라인 셀렉숍 ‘더카트골프’다. 이곳에는 말본골프를 비롯해 아넬·노프랍 등 130여 개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지포어도 코오롱몰이 아닌 더카트골프에서만 온라인 판매가 이뤄진다. 최근에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각광받는 미국의 골프공 브랜드 컷골프도 입점했다. 그 결과 지난달 기준 더카트골프의 신규 가입자 수는 전년 대비 6배가량 증가했다. 같은 기간 거래액은 10배 이상 늘었다.
가격대가 높은 골프웨어의 경우 온라인보다 오프라인 소비를 선호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이 때문에 다(多)브랜드 구매층에 대한 데이터 확보가 어렵다. 코오롱FnC는 더카트골프를 통해 고객 데이터를 확보하고 이를 사업에 활용하며 시너지를 내고 있다. 더카트골프는 연내 입점 브랜드 수를 200여 개로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아울러 골프웨어를 주문하면 다음 날 받아볼 수 있는 ‘익일배송’ 서비스도 준비 중이다.
지식재산권(IP)과 관련한 신사업도 검토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캐릭터 시장 규모는 연평균 7.8%의 성장세를 보이며 올해 2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왁은 악동 캐릭터 ‘와키’를 내세워 젊은 골퍼들을 상대로 인지도를 빠르게 키웠다. 최근에는 일본 산리오의 헬로키티와 협업해 상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일시적으로 운영한 왁X헬로키티 팝업스토어에는 하루 평균 1500명의 방문객이 찾아오며 가로수길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 밖에 왁은 글로벌 캐릭터 브랜드 BT21·소니엔젤 등과도 손잡고 브랜드 스토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향후 패션을 넘어 외식 분야와의 협업 가능성도 열려 있다. 김 대표는 “더 매력 있고 풍부한 공감 스토리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와키 캐릭터로 발전시켜 성공적인 K캐릭터 비즈니스 사례를 만들어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