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띠를 졸라맸는데도 매달 나가는 비용은 오히려 늘어납니다. 쓰고 싶어도 쓸 돈이 없습니다.”
40대 맞벌이 직장인의 가구당 월평균 수입은 1000만 원에 달한다. 적은 돈이 아니다. 하지만 벌어들인 게 많을수록 지출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결혼해 아이를 낳아 부양가족이 많아질수록 지출은 예상을 넘어선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살림에 가파르게 오르는 물가와 금리는 소비심리를 얼려버린다. “돈 나갈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탄식이 터질 수밖에 없다. 치솟는 물가로 장보기가 겁이 난다. 한국은행의 ‘물가안정목표 운영 상황 점검’ 보고서에 따르면 소비자물가는 올해 들어 빠르게 상승세를 타고 있다. 지난해 10월 이후 줄곧 3%대였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달 5.4%를 기록하며 2008년 5월(5.6%)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나타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연일 폭등하는 유가 등의 외부 변수를 감안하면 6월 물가 상승률은 전달보다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대출금리도 요동치면서 직장인의 가계부를 위협한다. 미국이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28년 만에 ‘자이언트스텝(0.75%포인트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서 한국은행의 ‘빅스텝(0.5%포인트 금리 인상)’ 가능성도 높아지다 보니 국내 국고채 금리가 오르면서 금융채 금리 역시 덩달아 뛰었다. 그 결과 금융채를 기준으로 하는 고정형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금리도 올랐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2019년 5월 5대 은행(KB국민·신한·우리·하나·NH농협)의 분할 상환 방식 주택담보대출 평균 금리는 2.89~3.22%, 신용대출 평균 금리는 3.80~4.44%였다. 하지만 올 5월 기준 5대 은행의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서민금융 제외) 평균 금리는 각각 3.84~4.37%, 4.23~4.29%를 기록했다. 변동형 주택담보대출 준거 금리인 자금조달비용지수(COFIX·코픽스)도 매달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변동형 주택담보대출을 이용하고 있는 한석윤 씨의 경우 최근 3년 새 대출 비용이 45만 원에서 60만 원으로 늘었다. 한 씨는 “대출 이자가 3년 만에 1.5배 증가하면서 부담이 커졌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전기·수도요금 등 늘어난 공과금도 부담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전기·가스·수도요금 등은 전년 동기 대비 9.6%나 올랐다. 서울 강남구에 거주하는 30대 직장인 A 씨는 미혼임에도 3년 만에 공과금이 30만 원에서 45만 원으로 늘었다. 40대 맞벌이 부부의 상황도 비슷하다. 2019년 15만 원이던 공과금은 올해 20만원으로 불어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이와 관계 없이 ‘급한 불’부터 끄자는 심정으로 여가비나 통신비 등 비(非)필수 지출을 아예 제로로 만들려는 직장인들이 대다수다. 한창 골프에 재미를 붙인 한 씨의 경우 올해부터는 필드를 나가기보다는 스크린 골프장을 이용하려 한다. 한 씨의 가계부에서 여가 비용은 3년 전보다 월 30만 원 줄었다.
일부 직장인들은 식비 등 필수 지출 비용 긴축에 나섰다. 경기도 일산에 거주하는 30대 직장인 B 씨는 2019년부터 3년째 매달 나가는 식비가 100만 원으로 동일하다. 물가 상승에도 동일한 식비를 유지하려다 보니 마트보다는 재래시장을 이용하고 구입하는 물품도 줄였다. 하반기에는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식품물가는 아직 정점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노무라홀딩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글로벌 식품물가 변동의 여파가 아시아 지역으로 미치기까지는 대략 6개월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아시아 식품물가는 올 하반기 더욱 치솟을 것으로 내다봤다.
직장인 가계부의 아킬레스건은 교육·육아비다. 의식주 비용에 통신비까지 필수 비용도 감축에 나서지만 줄일 수 없는 비용이 자녀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 씨의 가계부에도 3년 전 100만 원이던 교육비는 현재 280만 원으로 3배 가까이 뛰었다. 한 씨는 “아이가 큰 것도 있지만 터무니없이 오른 베이비시터 비용에 영어 유치원 등까지 추가로 보내야 하니 덜 먹고 덜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물가와 금리 상승에 소비가 위축될 경우 장기 성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실제 지난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성장기여도를 보면 전년 동기 대비 내수가 3.1%포인트, 순수출(수출-수입)이 0.8%포인트를 기록했다. 지난해 4분기만 놓고 보면 성장기여도는 내수가 5.0%포인트, 순수출이 -0.9%포인트를 나타냈다. 내수가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커지고 있는 것이다. 박성우 DB금융투자 연구원은 “높은 인플레이션, 시장금리 급등에 따른 부채 원리금 상환 부담 증가 등 가계의 구매력이 예상보다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며 “보복소비에 따른 내수 회복은 곧 한계를 나타낼 수밖에 없는 만큼 소비 위축에 대비한 구체적인 정책 대응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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