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권력과 종교에 봉사하던 시절을 지나, 교훈적 내용과 이상적 아름다움을 찬양하던 때를 거쳐, 신고전주의의 고상함과 낭만주의의 격정을 떨치고 도달한 곳은 사실주의(Realism)였다. 1840년대 프랑스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나 장 프랑수아 밀레 등이 그린 리얼리즘은 눈으로 본 것의 정확한 묘사를 추구하며 별스러울 것 없는 주제와 인물, 대수롭지 않은 소재이거나 굳이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들춰내곤 했다. 리얼리즘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표출됐다. 미국으로 건너간 리얼리즘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보여주듯 일상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정지시켜 놓곤 했다. 현실을 초월해버린 리얼리즘은 초현실주의(surrealism)라는 이름으로 의식 너머를 더듬으며 정신의 새로운 세계를 갈구했다. 추상표현주의를 탈피하며 나타난 미국의 신사실주의(New Realism)는 ‘팝아트’의 다른 이름이 됐고, 프랑스의 누보레알리슴(Nouveau Realisme)은 기계화·공업화 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명목으로 일상용품과 폐기물 같은 것들을 작품에 이용하기도 했다.
어느 시대나 각자의 리얼리즘이 존재한다. 지금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을 ‘비(非) 현실의 하이퍼 리얼리즘’이라 명명한 기획전 ‘Over and Above’가 강남구 역삼동 두남재아트센터에서 30일까지 열린다. 박미라·이재석·전희수의 3인전이다. 현실에 기반한 이미지들이 가상적 풍경을 그리고, 이것이 다시금 현실과 공명하는 독특한 경험을 주는 전시다.
이재석, 봤음직한 것들의 비현실적 장면
흰 천이 펄럭이다 멈췄다. 천막을 철수하는 중인지, 바람에 휘청인 순간인지, 누군가에 의해 파괴된 장면인지 알 수 없다. 작가 이재석의 ‘펄럭’ 속 텐트는 아마도 군막(軍幕)인 듯하다. 발사된 미사일의 궤적이 아름다운 왕관 장식처럼 조화롭게 내리꽂히는 장면을 그린 ‘사정거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분출하는 기념탑’을 이루는 원통형·원뿔·구형의 기하학적 요소들은 대포·미사일·포탄 같은 전쟁무기를 떠올리게 한다. 핏빛 붉은색 탑 위쪽에 해골 하나가 끼어 있다. 기념탑 뒤로 드러난 돌산은 전쟁의 광기가 쌓은 야만의 역사를 상징하는 듯하다.
이재석은 현실의 소재들을 지극히 섬세한 묘사, 조화로운 구성, 고운 색감으로 그리지만 정작 작품 속 장면은 비현실적이다. 살바도르 달리나 조르조 데 키리코 같은 초현실주의 회화의 낯선 느낌을 풍기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 오래 멈춰서 보게 만드는 그림에 대해 작가는 학교와 군대에서 체험한 “눈에 보이지 않는 통제와 수직적인 권력구조”에 대해 귀띔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제는 ‘진짜’ 현실이 된 전쟁의 잔혹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광기와 위험을 경고한 그림이 성화(聖畵)같은 경건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지점이 독특하다. 천막 밖으로 드러난 두 발이 자는 사람의 것인지, 죽은 시신의 것인지 모호하면서도 르네상스 시대 종교화의 일부를 보는 듯한 시각적 만족감을 준다. 현실에 기반한 비현실적 장면이, 과할 정도로(hyper) 현재를 직시한 것 만큼이나 기묘하다.
박미라, 경험했으나 본 적 없는 풍경
성실하게 공들인 묘사는 박미라도 마찬가지다. 대신 그는 좀 더 내밀하고 고립된 세상으로 관객을 이끈다. 동굴로 기어들거나 땅 속을 파고든 것 같은 그의 풍경에는 가시 돋힌 소파, 구멍 뚫린 의자, 다리 부러진 탁자 등 무엇 하나 편한 게 없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5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나 16세기의 피터 브뤼겔의 작품처럼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듯하나 힌트는 많지 않다. 구성요소 하나하나는 일상적 경험과 관련된 것들이지만 모여서 이룬 풍경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조차 본 적 없을 것같이 낯설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그림의 그 각각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면서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다른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고 어떤 내러티브(서사)를 만들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인과관계가 없는 구성들이지만 관객이 이것들을 잇고 엮어 상상을 펼쳐가는 과정에서, 각자의 경험과 자신만의 리얼리즘이 투영될 수 있다. 흑백그림이지만 관람객 각자의 경험치만큼 색채를 상상하는 묘한 맛이 있다.
이번 전시에 맞춰 벽화처럼 제작한 ‘쌓여가는 위로들’에는 상처입은 채 손목 잘린 손들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다. 패이고 찢기고 피 흐르는 손이지만 맞잡고 의지하는 형상이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을 견뎌낸 우리의 시대를 반추하는 듯하다. 찢어진 상처 틈에 새가 둥지를 만들고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나기도 한다. 가시 돋힌 손이라 생각했던 것이 뿌리·싹 움트는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면 병든 우리 세계를 힘 모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도 있겠다.
전희수, 만화·게임 속 리얼리즘
스마트폰과 컴퓨터, TV부터 게임까지 현대인은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 보며 보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팬데믹 상황을 거치며 증폭됐다. 가상인간과 메타버스가 일상으로 들어온 지도 오래다.
이같은 현실 속에서 전희수 작가는 만화와 게임의 장면을 그린다. 만화적 기법을 차용했던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 애니메이션을 소재로 한 무라카미 다카시의 ‘슈퍼플랫’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전희수의 그림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건·사고의 장면이 펼쳐진다. 작가 자신은 작품에 대해 “유머와 블랙코메디”라고 말했지만, 게임의 한 장면이 지하철 사고현장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에 ‘비가상공간(Non virtual space)’이라고 제목 붙인 것은 뼈 있는 농담인 셈이다. 게임과 만화의 필치는 분명 가상과 허구를 그린 것이지만, 이미 게임·만화를 체화한 작가는 그 틀 속에서 자신만의 리얼리즘을 구사한다.
작가의 작업실 모습을 거의 그대로 옮겨다 놓은 벽면 설치작업이 그 실마리다. 만화와 게임에서 발췌하거나 변형·재해석한 그의 드로잉과 회화들이 여기저기 걸려있고,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됐고 영감을 얻기도 하는 각종 피규어와 미니어쳐들이 함께 배치됐다. 현실에서의 경험이 어떻게 만화·게임을 재해석하고, 어떤 방식으로 허구 속에서의 현실성을 그려내는지 추적해 볼 수 있다. 만화 속 캐릭터를 얼굴이나 손발이 여럿인 형태로 그린 연작들은 흔들리는 정체성을 되짚어보게 한다. 공감하고 친근감을 느낀다면 ‘전희수 시대의 리얼리즘’이 통한 셈이다.
두남재아트센터는 지난 2월 개관한 신생 예술공간이다. 박수련 두남재아트센터 대표는 “갤러리 밀집지역에서 외떨어져 있긴 하지만 ‘미술관 불모지’인 강남에서 ‘예술적 오아시스’가 되고자 한다”면서 “인근 직장인을 비롯한 유동인구가 많고, 엔데믹과 맞물리면서 하루 관람객이 200~300명씩 이어져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개관 기획전을 세대별 연중 프로젝트로 전개할 계획”이라며 “이번 전시는 독창성과 실력을 갖췄으나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를 가지지 못한 30대 작가로 꾸렸고, 향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나 도약이 필요한 40대 작가, 입지를 다졌으나 보다 치밀한 맥락화가 필요한 60대 이상의 작가 등의 전시를 순차적으로 소개해 한국 현대미술에 기여하고자 하는 두남재의 정체성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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