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지수가 4일 또다시 외국인의 매도세에 눌려 연저점을 경신했지만 국내 자본시장의 버팀목으로 간주되는 연기금 및 공제회 등이 순매도를 지속하자 개인투자자를 비롯한 시장 관계자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있다. 올해 들어 글로벌 증시가 금리 인상 속에 대부분 약세를 면치 못하는 가운데 코스피 하락 폭이 가장 큰 것은 중국이 배후에서 외국인의 매도 폭탄을 부채질하기 때문이라는 의혹도 나오지만 이 같은 시장 상황을 잘 아는 연기금 고위 운용역들이 단기 수익률 방어에만 치중해 ‘몸 사리기’를 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4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5.08포인트(0.22%) 하락한 2300.34로 거래를 마쳤다. 장중에는 2276.83까지 밀리며 1일에 이어 장중·마감 기준 모두 연저점을 다시 경신했다.
코스피가 올 상반기에만 22.6% 급락하며 하락률이 미국·유럽은 물론 신흥국 지수보다 높은 것은 1일까지 외국인이 20조 원 넘게 순매도한 것이 주요인이지만 연기금도 이에 가세해 코스피에서만 4500억 원가량을 순매도했다. 연기금은 이날도 6거래일째 순매도세를 이어가며 최근 1주일간 약 1600억 원어치의 주식을 팔아 치워 코스피 하락을 부추겼다.
연기금이 국내 주식 매입에 신중한 것은 수익률 방어라는 측면이 있지만 투자를 총괄하는 최고투자책임자(CIO)들이 대부분 문재인 정부 때 선임돼 새 정부의 눈치를 보며 시장 상황에 둔감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한국 경제나 주요 기업들의 실적이 나쁘지 않은데도 최근 외국인들이 매도 폭탄에 가까울 만큼 ‘팔자’를 지속하는 배경에는 급변하는 지정학적 환경에서 중국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국내 대형 로펌의 한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가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 참여하거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가까워지면서 중국이 압력 수단으로 한국 증시 하락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얘기가 국제금융시장에서 들린다”고 전했다.
금융감독원이 5월 말까지 국가별 우리나라의 상장 주식 보유 현황을 집계한 결과 중국이 사실상 정치·경제를 완전 장악한 홍콩의 보유액이 5개월간 4조 원 이상 줄며 감소율(27.7%)이 주요국 중 가장 컸다. 이는 외국인 전체의 국내 상장 주식 보유액 감소율인 11.4%의 두 배를 넘고 외국인투자가 중 비중이 가장 큰 미국(10.2%)에 비해서도 두드러진다. 금융 투자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중국이 국내 주식 보유액은 전체 평균 수준으로 줄이면서 영향력이 큰 홍콩과 싱가포르·룩셈부르크 등을 통해 자금을 대거 빼가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연기금이 국내 증시 비중 축소에 급급한 데 대해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이제 장기적 관점에서도 가격 메리트가 충분한 종목들이 많다” 며 “점진적 매수 기조로 선회하는 것이 기금의 수익률 제고 측면에서도 유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기금 CIO 9명 중 8명 文정부 인사…보신주의에 '구두 개입'도 안해
국민연금을 비롯해 국내 자본시장의 큰손인 연기금·공제회 등의 자금 운용을 총괄하는 최고투자책임자(CIO)들이 문재인 정부에서 선임되거나 연임된 인사들이 대부분이어서 증시가 외국인의 폭탄 매도 속에 추락하고 있지만 정권의 눈치만 보며 면피식 운용과 투자로 일관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연기금 CIO들은 모두 자본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이지만 거의 지난 정부 시절 선임됐고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경우도 있어 주가가 매수에 나설 수준으로 떨어졌어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은 물론 기관투자가들조차 연기금 CIO 등 고위 관계자가 언론 등을 통해 구두 개입이라도 하며 시장의 회복력을 높여주길 바라지만 자본시장의 리더들은 보신주의에 급급한 실정이다.
서울경제가 4일 주요 연기금 및 공제회 9곳의 CIO 선임 시기 및 임기 등을 확인한 결과 8명은 문재인 정부에서 선임됐다. 공무원연금공단의 CIO로 백주현 전 삼성생명 대체투자부장이 이달 선임되기는 했지만 윤석열 정부의 인사권이 미쳤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적지 않다.
정부의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 연기금 CIO들이 새로 출범한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증시 하락기에 개미투자자들의 비명 소리는 커지고 있지만 제 역할은 방기하고 단기 수익률 방어에만 급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국내 자본시장의 가장 큰손인 국민연금의 안효준 CIO는 임기가 석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안전 투자’에 매달려 있다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한 기관투자가는 “과도한 투자 위축이 일어나는 시장 환경에서 국민연금 고위 관계자가 자연스러운 발언만 해줘도 급격한 투심 위축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실제 시장 개입이나 매수 여부를 공개할 수는 없겠지만 ‘필요한 경우 매수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등 구두 개입만 해줬어도 한쪽으로 쏠린 시장의 균형을 어느 정도는 잡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서울증권 뉴욕사무소장과 호주 ANZ 펀드매니저를 지내고 국민연금에서 해외증권실장과 주식운용실장을 거쳐 교보악사자산운용 대표와 BNK투자증권 사장을 지낸 안 CIO지만 3월 대선 이후에는 최대한 외부 활동을 줄이며 해외 투자 확대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CIO 임기 석달 남겨둔 국민연금, 단기 수익 방어 안전투자만 매달려…사학연금·공제회 등도 소극 행보
국내 연기금의 맏형인 안 CIO가 국내 주식 투자에 소극적 모습을 보이자 대부분 이전 정부에서 선임된 CIO들도 몸만 사리는 형국이다. 이스트스프링자산운용코리아와 엔에이치아문디(NH-Amundi)자산운용 CIO를 지낸 이규홍 사학연금 CIO는 2019년 9월 취임한 후 지난해 9월 임기가 1년 연장됐다. 이 CIO 역시 주변에서는 “임기가 두 달 남았는데 어떤 모험이나 책임질 일을 하겠느냐”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이 좀 더 책임 있고 장기적인 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기금운용본부를 총괄하는 국민연금 이사장이나 보건복지부 장관을 서둘러 임명 혹은 지명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 지난해 선임된 이상희 군인공제회 CIO나 이도윤 노란우산공제 CIO, 한종석 경찰공제회 CIO 등도 국민연금의 투자 스탠스를 따라가며 최근 증시 급락에도 “저점을 확인한 것은 아니다”라는 분석 속에 국내 주식 매입에 신중을 거듭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증권사의 연구원은 “연기금이 국내 주식 매입에 소극적인 것은 장기 운용 전략으로 국내 비중을 줄이고 해외 비중을 늘리고 있는 추세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면서 “무엇보다 시장 불확실성이 크다 보니 장이 언제 좋아질지 확신할 수 없어 매수를 꺼리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시장에서는 향후 코스피지수 등이 추가 하락을 하더라도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이제는 매수에 나설 때가 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금융 투자 업계의 한 관계자는 “올 들어 코스피지수가 22% 이상 떨어지며 글로벌 증시에 비해서도 가장 큰 낙폭을 기록했다” 며 “이 정도 주가 수준이면 연기금이 충분히 내부 의사 결정을 통해서도 매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시점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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