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 사태 이후로 크립토 대형 기관 투자자들이 무너지고 있다. 글로벌 크립토 헤지펀드인 쓰리애로우 캐피털(3AC)이 파산한 데 이어, 미국의 암호화폐 대출 플랫폼인 보이저 디지털도 지난 5일(현지시간) 파산을 신청했다.
연쇄 도산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우선 글로벌 규모의 프로젝트인 테라가 10여일 만에 완전히 주저앉으면서 테라에 투자했던 대형 투자기관들에게 큰 손해를 끼쳤다. 테라 몰락 여파로 비트코인(BTC)을 비롯한 암호화폐 전반이 폭락한 것도 큰 원인이다. 그동안 높은 레버리지를 활용해 자금 운용을 했던 기관 투자자들이 이 기간에 큰 피해를 입었다.
파산 가능성이 높아 ‘다음 타자’로 주목받던 셀시우스가 상당량의 부채를 무사히 상환하면서 크립토 시장도 한숨 돌리는 분위기다. 그러나 탈중앙화금융(DeFi, 디파이) 시장은 이번에 받은 타격을 만회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단순 금전적인 문제가 아니다. 디파이라고 알고 있었던 많은 프로젝트가 사실은 상당히 중앙화적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개발팀이 핵심 기능 마음대로 제거하는 디파이가 무슨 의미?
탈중앙거래소(DEX) 프로토콜 방코르(Bancor)는 손상차손보호(ILP) 프로그램으로 유명했다. ILP란 비영구적 손실(IL)을 자체 토큰으로 보상해주는 프로그램으로, 방코르에 유동성을 제공하는 사용자들에게 제공되는 인센티브의 일종이다.
방코르는 지난 6월 21일 돌연 ILP 프로그램을 일시적으로 중단한다고 밝혔다. 방코르 토큰 가격이 며칠만에 70% 이상 하락하면서, 사용자들의 비영구적 손실을 보상해줄 여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3AC와 셀시우스가 자금 확보를 위해 연쇄적으로 방코르 토큰을 매도한 것이 토큰 가격 하락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6월 28일 기준으로 방코르가 LP 제공자 모두에게 지급해야하는 비영구적 손실 금액은 한화 약 400억 원으로 추정된다. 방코르 팀 입장에서는 테라부터 시작된 3AC, 셀시우스의 몰락이 본인들의 프로토콜을 무너뜨리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수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ILP 서비스는 100일 이상 스테이킹을 한 이용자에게만 지급하는 일종의 프리미엄 서비스이기 때문에 충성 고객들이 느꼈을 배신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또한 비영구적 손실은 큰 하락이 있을 때 극대화되기 때문에 방코르를 믿고 자신의 자산을 헐어 유동성을 제공했던 이용자들은 이번 하락에서 이중고를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디파이 프로토콜임에도 불구하고 방코르 개발사가 직접 핵심 기능을 끄고 켜는 직접 조치에 나선 것에 대해 유저들의 반응은 크게 나뉘고있다. 개발사에서 직접 나서서 방코르 토큰의 가격 하락을 막았다는 점에서 프로토콜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게 아니냐는 옹호파와 앞으로 이슈가 생길 때마다 핵심 기능을 켜고 끌 수 있는 디파이 프로젝트는 신뢰할게 못 된다는 반대파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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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나 기반 대출 프로토콜인 솔랜드(Solend)도 이번 하락에서 도산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던 프로젝트다. 이들은 연쇄 청산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그동안 디파이 시장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신박한 해법을 내놨다. 솔랜드 고래 투자자 지갑에 대한 접근 권한을 얻어내어 청산이 프로토콜을 거치지 않고 장외거래(OTC)로 진행되게끔 하는 방법이었다.
통상 청산 과정은 공개시장에서 진행된다. 고래 투자자 지갑에 있던 다량의 물량이 한꺼번에 청산 되면 큰 규모의 시장가 매도가 쏟아지면서 폭락이 발생하고 연쇄 청산이 일어날 수 있으니 해당 물량을 장외거래로 분리하자 것이 솔랜드 팀의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곧장 거버넌스 투표에 올랐다.
디파이 사용자라면 이해하기 힘든 제안이었지만 놀랍게도 97.5%가 이 제안에 찬성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97.5% 중 90%가 한 사람의 지분에서 나온 찬성표였다. 사용자들은 이러한 투표 형태는 진정한 탈중앙화 거버넌스의 의미에 반한다고 거세게 반발했고, 결국 팀이 해당 제안을 무효화하는 투표를 다시 올리며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유니스왑, 아베…보수적 디파이 프로토콜은 하락에도 큰 타격 없어
솔랜드 팀에서 탈중앙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연쇄 청산을 막으려 했던 배경에는 최근 급증한 ‘청산 헌터’들이 있다. 청산 헌터란 쉽게 청산이 될 만한 계약을 찾아다니며 공매도 포지션을 잡는 투자 전문가들을 말한다. 이들은 암호화폐 가격이 특정 가격 아래로 떨어지도록 집중 매도를 쏟아내, 연쇄 청산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올린다.
청산 헌터의 행태가 옳은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일각에서는 그들의 활동이 프로토콜을 좀 더 건강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청산 헌터의 존재가 지금 업계 관행처럼 굳어 있는 무분별한 고(高)레버리지 활용 투자에 경종을 울리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청산 헌터들이 야기하는 연쇄 청산이 암호화폐 가격 급락으로 이어지며, 다른 선량한 투자자들에게 손해를 끼친다는 점을 지적한다.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첨예한 이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번 하락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던 디파이 프로토콜들이 모두 낮은 레버리지를 사용하는 곳이었다는 사실이다. 유니스왑(Uniswap), dYdX, 아베(AAVE), 메이커다오(MakerDAO) 등 유명 디파이 프로토콜들은 사용자에게 지급하는 이율이나 혜택을 보수적으로 설정했고, 오히려 이번 하락을 지나며 다른 프로젝트 대비 비교 우위를 확실히 다지는 분위기다.
방코르처럼 사용자 보상을 주요한 모델로 삼고 있는 프로젝트 또한 높은 보상율과 IL 혜택을 무리하게 제공해서 중도 서비스 중단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방코르의 경우 단일 유동성 제공 서비스도 제공했는데, 스테이킹보다 높은 이자율을 제공했다. 단적으로 체인링크에서 LINK 토큰을 스테이킹하면 5%의 연이율을 제공하지만 방코르에선 10.7%를 제공한다. 만약 평소에 이런 인센티브를 줄이고 하락을 대비한 유보금을 확보해뒀다면 서비스를 중단하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테라가 무너진 후, 암호화폐 업계 전반에 겨울 분위기가 역력하다. 지난 2018년처럼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는 하락장으로 접어들 수도 있다. 이번 하락을 지켜본 투자자들은 이제 과거보다 높은 기준으로 위험 관리를 하려 할 것이다. 높은 이자와 인센티브를 ‘묻지마 제공’하며 사용자를 끌어들이던 크립토 금융 프로젝트들도 이제 지속 가능한 서비스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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