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의 파장이 크기는 큰가 보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이 지났는데도 공공기관장 사퇴 소식은 별로 들리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무리수를 썼다가는 영락없이 직권남용죄로 쇠고랑을 찰 터이니 다들 자중하는 모양이다. 그런 차에 ‘KDI 사건’이 터졌다. 홍장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한덕수 국무총리가 자신을 콕 집어 저격하자 무슨 KDI 독립 투사인 양 “KDI가 정권 나팔수인가”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기가 막힌다. 사임한 그는 KDI의 연구 독립성, 중립성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지난해 원장에 취임하자마자 문재인 정부 정책을 자화자찬하는 국제 행사를 열었다. ‘한국판 뉴딜과 미래를 여는 정부’ ‘포용 사회와 복지를 확장한 정부’ 등 세부 주제를 보면 지금은 사라진 국정홍보처 행사를 방불케 한다. 그런 그가 정권 나팔수 운운한다는 것은 KDI에 대한 모독이자 방귀 뀐 사람이 성내는 격이다.
홍장표 해프닝은 정권 초 어김없이 반복되는 공공기관 흑역사다. 되풀이되는 풍경은 또 있다. 어째 잠잠하다 싶었는데 공공기관 개혁 이슈가 또 부상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공기업 파티는 끝났다”며 ‘신의 직장’의 방만 경영을 수술대에 올리겠다고 했다. 기시감이 드는 발언이다. 10년 전 박근혜 정부의 현오석 초대 경제부총리가 그런 말을 했다. 10년 전 끝났다는 파티가 왜 계속되는지, 이제는 신물이 다 난다.
현 정부는 빚더미 공기업을 물려받아 억울한 심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 정부 탓을 한들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라는 공기업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한국전력이 ‘대학이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한다’는데도 전남 나주에 에너지공대를 설립한 것이나 한국수력원자력이 월성1호기를 조기 폐쇄한 것이 그들의 자율적 결정만이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직권남용과 배임은 늘 교도소 담벼락의 경계선에 있다.
공공기관 개혁 드라이브가 버티는 옛 정권 인사를 몰아내기 위한 포석이라는 뒷말이 나오지만 딱히 그렇게 볼 것만도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사회적 가치’ 실현을 공공기관에 요구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공공성’ 추구라면 묻지도 따지고 말고 돈을 많이 쓰라는 주문과 다름없다. 그 결과 350개 공공기관의 직원 수는 5년 동안 12만 명 늘어났지만 돈을 허투루 쓰다 보니 공기업 1인당 영업이익은 1억 원 수준에서 150만 원으로 확 줄었다.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바로잡겠다는 데 토를 달 생각은 없다. 재무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불요불급한 자산을 매각하거나 정원을 동결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곁가지다. 개혁의 본질은 거버넌스의 개혁에 있다. 누가 보더라도 무자격 낙하산인데도 합법적으로 적격 전문가로 포장하는 게 지금의 공공기관 임원공모제가 아닌가. 그래서 정작 실력과 전문성을 겸비한 인재가 들러리 서기 싫다며 응모조차 하지 않는 부조리를 어떻게 해결할지 말이다. 적격자라면 정권 초 ‘방 빼라’ ‘못 뺀다’는 볼썽사나운 모습도 줄 것이다. 그런 맹탕 제도를 눈감는 공공기관운영위원회는 또 어떻고. 이게 다 제도를 설계한 기획재정부가 결자해지해야 할 사안이다.
더 중요한 것은 공공기관의 존립 가치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후속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다. 정부가 회원제 골프장과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왜 운영하고 특정 산업을 정부가 왜 독점해야 하는지, 유사·중복 기능으로 재원 배분의 효율성을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 공공성을 따진다면 밑도 끝도 없다. 존립 가치보다는 정치권과 부처, 지역사회의 밥그릇 논리가 앞선 게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이 거대한 카르텔을 깨지 못한다면 공기업 파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명박 정부 초기 이후 15년 동안 기능 재조정과 통폐합·민영화 같은 구조 개혁의 시계추는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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