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함에 따라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지자 중소·중견기업들이 고금리를 제시하며 현금 확보 전쟁을 치르고 있다. 지난달 회사채 순발행액이 -1조 2000억 원에 이를 만큼 채권 발행이 쉽지 않자 기업들은 7% 이상의 금리도 감수하며 사모 시장을 통해 긴급 자금을 조달하는 모습이다. 기업들의 현금 흐름이 악화하는데 회사채 시장의 위축이 지속되면 유동성 리스크가 하반기 본격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20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호텔·콘도 등을 운영하는 이랜드파크가 지난 주말 1년 만기 사모 회사채 40억 원어치를 연 7.2% 금리로 발행했다. 이랜드파크가 6월 중순 40억 원의 사모채를 6% 금리로 조달한 것을 감안하면 한 달 만에 금리 부담이 120bp(1bp=0.01%포인트)나 치솟은 것이다.
에어컨과 김치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위니아 역시 최근 1년 만기로 102억 원을 사모로 조달하면서 7.0%의 금리를 부담하기로 했다. 앞서 통신 장비 기업인 케이엠더블유 역시 이달 7일 1년 만기 사모 회사채 50억 원을 연 5.9%의 금리로 조달했다. 2년 전 코로나19 사태로 실적이 악화하자 운영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한 회사채를 차환한 것인데 조달 금리는 2020년 4.8%에서 2년 만에 110bp 뛰어 이자 부담이 급증하게 됐다.
또 메가박스는 이달 12일 사모채로 250억 원을 연 4.75%에 확보했지만 신용도가 한 등급이라도 떨어질 경우 즉시 채권을 조기 상환한다는 콜옵션을 걸기도 했다. 사모채는 증권 신고서 제출과 청약 등의 절차 없이 투자자와 협의를 통해 발행하지만 공개적인 수요예측 절차를 거치지 않는 만큼 상대적으로 높은 조달 금리가 책정된다.
기업들이 금리 상승기에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공모채 대신 사모채 시장을 찾는 것은 회사채 투자 수요가 급감한 때문이다. 지난달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자이언트스텝에 이어 한국은행이 지난주 빅스텝을 밟자 채권 평가 손실을 우려한 기관투자가들은 이미 지갑을 굳게 닫고 있다. 공모주 우선 배정 혜택을 겨냥해 BBB등급 회사채를 잇따라 사들이던 하이일드펀드도 올 들어 증시가 침체되자 자금이 넉넉지 않은 상황이다.
올 들어 공모 회사채 시장에서 발행된 저신용등급 회사채(A~BBB등급)는 5조 5460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9조 3500억 원 대비 반토막 났다. 기업 입장에서는 수요예측을 벌이다 미매각을 내서 평판에 금이 가기보다 금리를 일부 높여주더라도 사모 시장에서 일부 투자자들과 협의해 자금을 조달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금리 상승에 이자 비용이 급증하자 현금 여력이 있는 기업들은 만기가 돌아온 회사채를 보유 현금으로 상환하고 있다. 에코프로비엠은 19일 만기가 돌아온 회사채 320억 원을 차환 발행 없이 상환했다. 한양(200억 원)과 무림페이퍼(150억 원), 현대로템(1000억 원) 등도 비용 부담에 회사채 발행 계획을 접고 현금을 털어 만기 채권을 회수했다.
일각에서는 기업들의 현금 보유량이 줄고 지금처럼 회사채 시장의 약세가 지속될 경우 유동성 리스크가 가시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한광열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미 시장에서는 올해 하반기와 내년 기업들의 이익 수준을 하향 조정하고 있다”면서 “경기 둔화로 영업이익과 영업 현금 흐름 창출이 미미할 경우 급증한 이자 비용이 기업을 짓누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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