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18일 중국공산당 19차 당 대회가 열리는 베이징 인민대회당. 근엄한 표정으로 단상에 선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장장 3시간30분에 걸쳐 3만 단어에 이르는 연설문을 큰 소리로 읽었다. 장쩌민 전 국가 주석이 줄곧 하품을 하다 결국 잠이 들 정도로 지루했지만 최근 수십 년간 가장 중요한 중국 관련 연설 중의 하나였다. 시 주석은 이날 “신시대”를 발표하며 “중국은 세계의 중심 무대를 향해 더 가까이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 무대에서 미국 패권주의에 정면 도전하겠다는 뜻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신간 ‘롱 게임’은 시 주석의 ‘중국몽’이 개인 특성을 나타내는 캐치프레이즈가 아니라 청나라 말기 개혁가들부터 공산당 창당의 주역들과 후계자들이 100년 이상 공유해온 대전략이라고 말한다. 가령 중국의 국부인 쑨원이 1894년 설립한 근대적 비밀결사 단체 이름부터 중국을 부흥시킨다는 뜻의 ‘흥중회’다. 마오쩌둥·덩샤오핑·장쩌민 등 공산당 지도자들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당의 사명이라고 못박았다. 이들은 19세기 아편전쟁 등으로 서구에 유린당한 굴욕을 씻고 3000년간 세계 최대 강국이었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대전략을 차근차근 실행해왔다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저자인 러쉬 도시는 현재 조 바이든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중국 담당 국장을 맡아 대중 강경책을 주도하고 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의 문서와 고위 관료들의 연설, 회고록 등을 바탕으로 패권 국가로 일어서기 위해 100년간 지속된 중국의 ‘롱 게임’ 세계 전략을 파헤친다.
저자에 따르면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이 중국에 무기를 팔았을 정도로 양국은 준동맹국이었다.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과 3년 동안 ‘3대 트라우마 사건’이 터지면서 양국 관계가 급변했다. 1989년 톈안먼 시위는 서방 이데올로기의 위협을, 1990~1991년 걸프전은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에 대한 두려움을, 1991년 소련 붕괴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이후 지정학적 위협을 중국에게 상기시켰다. 이 때부터 중국은 30년에 걸쳐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도전하기 위한 대장정에 들어간다. 하지만 중국은 힘의 역학관계상 아직 야망을 드러날 때가 아니라고 보고 ‘미국의 힘 약화→지역 패권 구축→패권 확장’이라는 3단계 전략을 구사한다.
덩샤오핑의 ‘도광양회(능력을 감추고 참고 기다린다)’는 첫 번째 단계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을 기다려도 늦지 않다.” 중국은 미국과의 직접적인 경쟁을 피하면서도 미국의 힘과 영향력을 조용히 약화시키는데 주력했다. 이 같은 비대칭 전략은 후진타오 집권 1기까지 이어졌다. 군사적으로는 잠수함과 기뢰, 대함 미사일처럼 중국 근해에서 미군을 막아낼 수 있는 무기체계에 집중했다. 또 미국이 국제기구를 통해 중국을 포위하지 못하도록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세계무역기구(WTO) 등에도 가입했다.
두 번째는 후진타오 집권 2기부터 시진핑1기까지 이어진 ‘유소작위(적극적으로 성취하다)’ 단계다. 중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하자 국제적인 힘의 균형이 바뀌고 있다고 판단하고 아시아 지역에서 패권 구축에 나선다. 군사적으로는 항공모함, 전투함 등 공세적인 작전 능력을 강화했고 남중국해 섬들에 군사 기지를 만들었다. 또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출범, 일대일로 정책을 통해 주변국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세 번째는 시진핑 2기부터 시작된 중국식 질서 구축이다. 중국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사태에 대한 미국의 무능력 등을 보면서 서구 쇠퇴의 신호라고 단언했다. 시진핑은 2019년 연설에서 “오늘날 세계는 100년 만의 대변동을 겪고 있으며 중화민국의 위대한 부흥 실현은 중대한 시기에 와 있다”고 선언한다.
현재 중국 글로벌 대전략은 모든 시간표가 건국 100주년을 맞는 2049년에 맞춰져 있다. 이 때까지 미국을 대체해 글로벌 거버넌스와 국제기구에 지도력을 행사하고 지구촌 대부분의 지역은 물론 우주와 북극, 남극에 이르기까지 군사기지를 세우는 것이 목표다. 또 미국 헤게모니를 유지시키는 달러 지배 질서를 약화시키고 인공지능(AI)부터 양자컴퓨터까지 4차 산업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해 미국을 쇠퇴시키려 한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중국의 질서가 완전히 실현되면 결국 일본과 한국에서 미군은 철수하고, 미국의 지역 동맹은 끝나며, 서태평양에서 미국 해군이 효과적으로 철수하고, 지역 내에서 중국이 이웃 국가들로부터 존중을 얻게 되고, 대만과의 통일이 이루어지며,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영유권 분쟁은 해결될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도전을 맞아 미국의 대응책은 무엇일까. 저자는 중국의 부상을 막거나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은 실현 가능하지 않고 시진핑 정부 전복도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단언한다. 해답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비용 대비 효과가 큰 ‘롱 게임 비대칭 전략’이다. 중국과 직접 대립하기보다는 다른 나라나 다자기구를 이용해 중국의 힘을 빼고 금융·기술·정보 등에서 중국과 격차를 벌리자는 것이다.
그는 군사적으로는 동맹국들의 중국 방어 무기 개발을 지원하고 중국의 해외 기지 구축 시도를 무산시켜야 한다고 주문한다. 중국이 주도하는 다자간 프로세스에 참여해 중국의 영향력을 후퇴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다. 또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 기술 절도 등에 대응하는 한편 달러화 지배력,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동맹 네트워크, 인재 유치, 혁신적인 경제 등 미국만의 강점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한국 관련 언급이다. 그는 기술·무역·공급망 표준에 이르는 거버넌스 문제에 대해 동맹국이 민주주의 연합을 구축하고 한국·일본·독일 등이 참여해 기초과학 연구개발을 위한 연합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 동맹 ‘칩(chip)4’에 한국 참여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책은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중국 견제를 위해 동맹국을 어떻게 활용하려는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참고할만하다. 2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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