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공평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점이 항아리에 담긴 채 무더기로 발견됐다. 1443년 훈민정음 창제 직후 사용된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법’으로 쓰여진 15세기 활자였다. 500년도 더 된 금속활자가 고스란히 발굴된 것도 놀랄 일이지만, 이 많은 활자들이 대체 어떤 목적으로 제작된 것인지에 대해 궁금증이 쏠렸다.
고려대 사학과 박사 출신으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근무하며 “중앙관서와 왕실 등에서 사용했던 활자 82만여 점”을 목격했던 저자는 연구자적 관점에서 더 큰 의무감이 발동했다.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의 활자를 조명하고 그 의미를 살핀 신간 ‘활자본색’의 탄생 배경이다.
조선 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태종은 1403년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를 만들며 “나라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책을 널리 읽어야 한다…내가 구리로 활자를 주조해 책을 얻는대로 인쇄하고자 한다”고 천명했다. 이미 고려시대에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를 발명한 우리다. 목판보다 금속활자가 훨씬 효율적이기도 하다. 과연 이유가 그 뿐이었을까? 태종은 활자 제작 비용을 백성들에게 거둘 수 없다며 왕실의 사유재산 창고인 내탕고의 구리를 내놓는 솔선수범과 함께 신하들에게 ‘자원’해서 구리를 내놓으라고 했다. 저자는 사마천의 ‘사기’를 인용해 “중국에서는 천하를 통일하면 무기를 거둬들이는 관례가 있다”면서 “태종은 무력을 상징하고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구리를 거둬들임으로써 신하들이 권력에 도전할 여지를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 아닐까”라는 견해를 조심스레 제시한다.
태종의 뒤를 이어 세종은 1420년에 경자자, 1434년에 갑인자를 제작했다. 이후 문종부터 중종 때까지 60년간 수차례 활자가 더 제작됐다. 그 수는 100만자 이상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금속활자를 거의 만들지 못했다. 금속활자는 당시 문화 수준과 경제력을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한 셈이다. 가장 많은 활자를 만든 왕은 정조로 100만 자 이상을 제작하게 했다. 이처럼 조선의 왕들이 금속활자에 몰두한 것에 대해 저자는 “다소 불경스러운 해석”이라는 전제로 “왕만이 가진 어떤 상징, 권력과 재물의 상징을 누리고 소유하고 싶은 심리”를 추론했다. 성리학 국가인 조선의 문화가 검약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군자의 도리를 실천하면서도 “자신만의 보물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이 ‘금속활자’였다는 것. 계몽을 위한다는 명분도 확실했다.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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