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표 얻기에 급급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탄소 중립이나 에너지 안보를 도외시하는 정치권의 행태가 안타깝습니다.” 에너지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최근 정유사 이익을 환수하려는 국회 행보에 대해 이같이 우려했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1일 정유사 임원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정유 업계가 상생 기금을 마련해 에너지 취약 계층의 생계를 도울 방안을 마련해보자”고 밝혔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정유사의 전년 대비 증가한 이익에 세금을 물리겠다는 내용의 이른바 ‘횡재세법’을 발의하기로 했다.
국회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정유 업계는 한숨만 내쉬고 있다. 정유 산업이 국가 전체적으로 기여한 성과가 있는데도 ‘악역’으로 내몰려야 하느냐는 반응이다. 주유소를 운영하는 내수산업이라는 통념과 달리 정유사들은 올 상반기 반도체 산업(690억 달러)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수출액(280억 달러·약 37조 원)을 달성했다. 특히 호주로 석유제품 수출을 대폭 늘리며 양국 간 에너지 협력에도 기여했다. 이는 한 방울의 원유도 나지 않는 한반도에서 국내 정유 업계가 우수한 정제 기술력을 확보했기에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역설적이게도 자원 부국인 호주가 한국의 석유제품 수입을 확대한 것은 에너지 안보 문제와 관련이 깊다. 글로벌 메이저 석유 회사인 미국 엑손모빌과 영국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이 과거 호주 내 정유 시설을 폐쇄하면서 호주의 디젤·가솔린 수입의존도가 높아졌다. 일본에서는 법제화를 통해 정제 시설 규모가 감축되면서 정유 업계가 수출은커녕 내수 공급도 빠듯해졌다. 2020년 기준 일본의 일일 정제 능력은 329만 배럴로 한국(357만 배럴)에 소폭 뒤처졌다.
국내에서 정유사 이익 환수가 관철될 경우 한국이 호주와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치권의 팔 비틀기로 정유 업계의 설비투자 여력이 사라지면서 에너지 안보에도 적신호가 켜질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정유 업계가 탄소 중립에 대비하기 위해 필수적인 친환경 투자는 ‘언감생심’이 될 수 있다. 국회가 정유 업계의 가치를 한국의 미래 에너지 안보 문제와 연관 지어 평가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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