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原乳) 가격 산정 체계 개편을 두고 낙농가와 유가공 업계가 대립하는 가운데 유(乳) 업계 1위인 서울우유협동조합이 소속 축산농가 조합원들에게 ‘목장 경영 안정 자금’을 지급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사료 값이 치솟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낙농가를 돕기로 했다는 게 이번 결정의 이유다. 표면적으로는 축산 농가를 지원한 것이지만 업계는 서울우유가 낙농가로부터 사오는 원유 가격을 사실상 올려준 것이라고 해석했다. 게다가 지원금 규모가 월 30억 원 수준에 달하는 만큼 자금 부담 상쇄를 위해 결국 소비자 판매가 인상에 나설 것으로 예상했다. 정부도 난감한 처지가 됐다. 우유 값 안정화를 목표로 원유를 용도별로 나눠 가격을 정하는 ‘차등가격제’를 추진하던 상황에서 서울우유의 이번 결정으로 제도 도입은 물론 물가 관리에도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17일 유 업계에 따르면 서울우유는 전일 대의원 총회를 열고 이달부터 소속 낙농가들에 목장 경영 안정자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지원금은 월 30억 원, 연간 360억 원 규모다. 서울우유는 국내 시장점유율 약 40%의 업계 1위 회사로 축산농가 조합 형태로 운영된다. 서울우유협동조합 관계자는 “사료 값이 오르면서 경영상 어려움에 처한 낙농가들을 지원하는 차원”이라며 “지급 기한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유 업계는 서울우유가 이번 결정을 통해 사실상 낙농가들로부터 사오는 원유 가격을 올려준 것으로 보고 있다. 전국 낙농가 5000여 개 중 서울우유 소속 낙농가는 1900여 개로 약 40%를 차지한다. 국내 연간 우유 생산량은 220만 톤으로 이중 서울우유가 70만 톤 이상 담당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를 리터(ℓ)로 환산하면 이번 지원금은 원유 값을 1ℓ당 58원씩 올려준 것과 맞먹는 규모”라고 설명했다.
현재 낙농가와 유가공 업계는 원유 가격 산정 방식 개편안을 두고 대립하고 있다 . 낙농가들은 사료 값 등 생산비가 폭등하고 있는 만큼 5월 통계청이 발표한 우유 생산비에 따라 올해 원유 가격을 ℓ당 47~58원 인상해 달라고 요구한다. 반면 유가공 업체들은 출산율 감소 등을 이유로 들며 원유 가격 현실화를 위해 정부가 지난해 제시한 용도별 차등가격제를 빨리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제도는 유가공 업체가 낙농가로부터 원유를 구입할 때 음용유(마시는 흰 우유용)와 가공유(버터·치즈 등 가공제품용)의 가격을 달리 매기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우유협동조합이 소속 낙농가들에 경영지원 자금을 지급하면서 사실상 원유 구입 가격을 올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최근 낙농가들이 유가공 업체인 서울우유·매일유업·빙그레 공장과 본사에서 원유 가격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는데 서울우유가 낙농가의 압박에 백기를 든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서울우유의 원유 구매 가격 인상은 우유 값 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서울우유 측은 “이번 지원금 집행에 따른 우유 제품 가격의 인상 계획은 아직 없다. 추후 낙농진흥법에 따라 결정되는 원유 가격을 따르겠다”는 입장이지만 지원 규모가 서울우유의 지난해 영업이익인 580억 원의 60%에 달해 우유 값 인상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업계에서는 리터당 58원이 오를 경우 소비자 가격은 500원 가량 오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서울우유의 이번 조치는 정부에도 부담이다. 용도별 차등가격제 개편의 동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처지가 됐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경영자금 지원 등은 서울우유가 자체적으로 결정할 사항”이라면서도 “원유 가격 결정 제도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는 중에 업계 전반에 영향을 끼칠 이번 결정을 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올 들어 낙농가를 대상으로 열아홉 차례에 걸쳐 제도 개편 설명회를 진행했지만 낙농협회와는 지난달 28일 협상 중단을 선언했다. 낙농협회가 설명회를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이유이지만 제도 개편 및 원유 가격 결정 논의의 핵심 참여자인 낙농협회와의 대화에서 정부가 먼저 손을 놓은 것과 다름없다. 특히 소비자들의 물가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밀크플레이션 우려까지 겹쳐 정부의 물가 안정 대책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 관계자는 “정부는 낙농협회와 신뢰가 회복되면 대화를 재개할 것”이라며 “차등가격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낙농가가 늘어나고 있는 만큼 낙농 제도 개편을 둘러싼 우려가 곧 수그러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