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 선생의 사상은 정조 때 실학 사상과 근현대 들어 1세대 기업인들의 철학적 뿌리가 됐습니다. 기술패권 시대, 우리 산학연이 정말로 기업가정신을 갖고 혁신해야 하겠다는 각오가 듭니다.”
1~2일 경남 진주·산청·의령에서 열린 ‘2022 과학기술 K-기업가정신 캠프’에 참가한 산학연 관계자들은 2일 산청 남명기념관과 산천재를 탐방하며 남명처럼 기업가정신을 갖고 임하겠다고 다짐했다.
남명(1501~1572년)은 16세기 조선에서 퇴계 이황과 어깨를 나란히 한 선비다. 하지만 당시 퇴계와 고봉 기대승 간에 ‘사단칠정론’에 관한 논쟁이 빚어질 때 남명은 지행합일을 강조하며 사회 변화를 꾀했다. 평생 재야에서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며 방책을 모색한 것이다. 남명은 30대부터 18년간 처가가 있는 김해 산해정에서 제자를 가르치다가 회갑이 되던 해 산천재를 짓고 타계할 때까지 11년간 실사구시의 정신을 설파했다. 칼과 방울을 차고 다니며 내 마음을 밝게 하고 의롭게 실천에 옮긴다는 경의(敬義)사상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인재 양성시 왜구를 경계하며 병법을 가르친 점도 특징이다. 실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인홍·곽재우 등 50명 이상의 제자가 의병장으로 목숨을 걸었다.
최구식 선비문화연구원장은 “남명의 사상은 경상우도(서부경남)에서 탄생한 삼성·LG·GS 등 기업가정신의 원류로 연구되고 있다”며 “이쪽 출신 기업들의 문화가 다른 곳과 좀 다르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산학연의 캠프 참가자 100여 명이 궂은 날씨에도 남명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것도 기술패권 시대 도전하고 모험하는 기업가정신을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남명은 단지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며 “그의 기업가정신을 계승해 우리가 과학기술 혁신을 통해 선도국으로 도약하는 과제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관영 원큐어젠 대표는 “글로벌 기업을 꿈꾸는 벤처인으로서 기업가정신을 꽃피우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명기념관 앞에 있는 있는 4개의 비석 중 키 큰 돌 조각상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16세기 당시 조선 선비답지 않게 다소 살이 쪄 보였다. 한 참가자가 이를 지적하자 김경수 선비문화연구원 박사는 “중국 조각가가 베이징에서 직접 조각했기 때문에 남명 선생께서 좀 살이 찐 것처럼 보인다”며 “중국 학자들이 뜻을 모아 조각상을 만들었다는 의미가 있다”고 답했다. 현대 중국에서도 남명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참가자가 남명선생신도비에 ‘생(生)’ 자가 거꾸로 쓰여 있다”고 지적하자 김 박사는 “틀린 게 아니고 위대한 역사적 인물은 ‘하늘이 내린다’고 해 ‘선생’의 생 자를 거꾸로 쓴다”고 설명했다. 생(生)은 생명이 땅에서 나는 모습을 본뜬 글자지만 위대한 인물을 가리킬 때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리는 모습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캠프 참가자들은 소박한 규모의 남명기념관을 둘러보며 경의사상에 관해 토론하는 등 선생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남명기념관에서 차도 하나를 건너면 바로 산천재에 닿았다. 처음 본 참가자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좁다”였다. 산천재는 경남 안동에 퇴계가 세운 도산서원과 견줄 만한 당대 최고 사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자들이 빼곡히 앉아야 10명 정도가 실내에 들어갈 수 있는 기와집 한 채는 소박했다. 실내에서 직접 남명의 말씀을 들은 제자, 문 너머 실외에서 들은 제자, 편지만 주고받은 제자 등 남명의 가르침을 받는 방법은 다양했다고 한다. 김 박사는 “산천재가 들어선 1561년 안동에서는 퇴계의 도산서원이 건립됐다”며 “조선을 대표하는 두 명문 사학 출신들이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종환 서울경제신문 대표이사 부회장은 “남명과 퇴계, 16세기 같은 시대에 살았던 두 사람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 그분들의 본질적 가치가 꼭 같은 것은 아니다”라며 남명의 기업가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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