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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본 선임기자의 관점] “복합위기 속 골든타임…리더십 세우고 비전 제시·국력 결집해야”

◆역사에서 배우는 위기 극복 리더십

엘리자베스 2세 英여왕 서거로 통합 리더십 재조명

전례없는 위기 극복위해 대통령실·여야 '정치복원' 필요

레이건·대처·루스벨트·링컨·클린턴·메르켈 사례 참고

남명·정조 등 '실사구시' 정신 살려 G5토대 구축해야

글로벌 퍼펙트스톰 상황에서 국가적 리더십을 구축해 G5 강국의 토대를 놓기 위해서는 국내외 지도자들의 위기 극복 리더십을 연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로널드 레이건(왼쪽부터) 전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




고광본 선임기자의 관점


8일 96세를 일기로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통합 리더십이 재조명되고 있다. 그는 영국과 영국의 옛 식민지 등 영연방 56개국의 상징이었다. 1952년 25세 때 왕위를 계승한 여왕은 판단력이 뛰어나고 유머 감각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돋보였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때는 개회식 영상에 ‘본드걸’로 출연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19세였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중위로 참전해 트럭을 정비, 운전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실천했다. 이런 여왕이 있었기에 영국 왕실은 일부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왕실 무용론’을 극복할 수 있었다. 물론 ‘입헌군주제’하에서 여왕이 정치적 책임을 질 일은 거의 없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윈저 이야기: 영국 왕실의 비밀’을 보면 여왕은 왕실의 인기가 너무 낮아 왕실 무용론이 나오는 것이나 역으로 왕실의 인기가 너무 높아 과도하게 기대치가 커지는 것 모두를 경계했다.

◇위기관리 능력 절실한 퍼펙트스톰에도 ‘미숙한 리더십’

여왕의 통합 리더십은 글로벌 퍼펙트스톰(초대형 복합 위기)이 몰아치는 요즘 참고할 만하다. 윤석열 대통령 등 당정청의 위기관리 능력과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기 위한 리더십이 미흡하고 미숙하다는 평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과 공급망 붕괴, 우크라이나 전쟁, 고물가와 경기 침체 등이 동시에 진행되는 복합 위기에는 국가의 생존과 미래 성장 동력 확충을 위해 국력을 결집해야 한다. 그런데도 국정을 책임져야 할 최고 지도자는 준비와 경험 부족 등으로 집권 초반부터 리더십 위기에 처했다. 30% 전후로 떨어진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반등하지 않고 여당은 당권 싸움으로 허송세월하고 있으며 야당은 국정 발목 잡기를 한다. 여야가 진흙탕 정쟁으로 치달으며 국정은 혼돈 상태에 빠졌다.

민간 주도 시장 경제, 한미 동맹 격상, 탈원전 폐기, 재정 건전화 추구 등 국정 기조는 나름 방향을 잘 잡았으나 미래를 위한 노동·교육·공공·연금 등의 구조 개혁은 진척되지 않고 있다. 역대 정권처럼 ‘규제 철폐’도 외치고 있으나 아직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양극화, 저출산·고령화, 지방 소멸 우려 대책이나 노사정 대타협 등 어려운 숙제에는 제대로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과학기술 5대 강국을 만들겠다면서도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내년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 예산은 올해보다 3% 증가에 그쳐 총예산 증가율보다 2.2%포인트 낮고 대학과 정부 출연 연구 기관 등 연구 현장에 대한 자율성 부여에도 인색하다.

대통령 5년 단임제에서 가장 중요한 첫해의 골든타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국가의 미래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기 위한 추진력과 포용성도 크게 부족하다.

물론 미국·중국·일본·유럽연합(EU) 등도 저마다의 고질병을 안고 있고 미래 개척을 위한 국가 리더십 구축에도 진통을 겪고 있다. 하지만 경제·안보와 과학기술을 한몸으로 묶어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우리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고 한눈을 팔면 글로벌 정글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우리는 반도체·배터리·자동차·조선·철강·화학 등 제조업뿐 아니라 한류의 원동력인 K콘텐츠의 힘도 강하다. 그만큼 저력이 있다. 따라서 미래 지향적 국정 어젠다를 제시하고 국가 리더십을 세워 국력을 결집하면 시너지를 내면서 주요 5개국(G5) 진입의 토대를 놓을 수 있다.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복합적인 국내외 도전과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대통령과 여당은 물론 야당까지 아우르는 초당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국가 리더십 정립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그렇지 못하면 윤석열 정부의 실패를 넘어 대한민국의 미래도 위태로워질 수 있는 비상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서양의 국가 흥성(興盛) 이끈 리더십 주목해야

우선 오일쇼크 이후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상황에서 1981년 초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Let’s 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비전을 내놓았다. ‘위대한 소통가’로 불리며 고비마다 국민을 설득했다. 우선 급격한 금리 인상 등으로 물가를 잡았고 재정 긴축과 감세, 시장·금융 규제 완화, 불법 파업 무관용이라는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경쟁력을 되살렸다. 기업가정신도 고취했다. 국방력을 강화해 소련과의 강 대 강 대치 끝에 냉전 종식의 계기를 마련했다.

‘철(鐵)의 여인’으로 불린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1979~1991년 집권)는 재정 긴축, 공공 분야 민영화, 노조 불법 행위 강경 대처 등으로 당시 지나친 복지와 경제 간섭의 폐해 등 이른바 ‘영국병’을 치유했다. 물론 레이건과 대처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열며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지적도 받는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의 와중에도 정적까지 포용하며 국가 통합을 이뤄낸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1861~1865년 재임)의 리더십은 단연 돋보인다. 그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내걸었고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1933~1945년 집권)도 1929년 말 시작된 대공황으로 양극화가 심해지자 부유세 강화, 노사 관계 제도화, 사회보장법 도입, 인프라 투자 확대 등 ‘뉴딜 정책’을 펴 경제위기를 극복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집권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1993~2001년 재임)은 재정 적자 축소와 부유층 증세를 추진해 보수·진보 모두의 반발을 샀으나 결국 재정 흑자, 물가 안정, 높은 경제성장을 이끌어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2009~2017년 집권)은 4500만 명 이상에게 의료보험이 없었던 현실에서 공화당과 고소득자는 물론 블루칼라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을 설득해 전 국민 의료보험 가입을 의무화했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2005~2021년 재임)는 정보통신기술(ICT)을 제조업과 물류에 접목하는 ‘인더스트리 4.0’을 표방하며 제조업 강국의 명예를 회복하고 난민 수용, 기후변화 대처 등에 앞장섰다. 그는 ‘무티(엄마) 리더십’으로 유럽의 리더가 됐다. 다만 급격한 탈원전 및 러시아 가스 의존 정책은 옥에 티로 지적된다.

◇우리에게도 남명과 정조의 ‘실사구시’ 리더십 있어

서양에 기사도 정신이 있고 유태인에게 후츠파 정신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남명 조식 선생 등의 선비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임진왜란이나 구한말·일제강점기 등 나라가 누란지위에 처했을 때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난 것은 우리의 저력을 보여준다. IMF 경제 위기 때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벌였다.

최근 서울경제가 산학연 관계자 등 100여 명과 함께한 ‘2022 과학기술 K-기업가정신 캠프’의 화두 중 하나도 남명 사상이었다. 남명은 지행합일과 실천을 강조하며 민생 구제와 튼튼한 국방에 주력했다. 세상을 혁신하기 위해 도전하는 ‘기업가정신(起業家精神)’의 원류 중 하나다. 정인홍·곽재우 등 남명의 제자 50명 이상은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각각 의병장으로 맹활약하며 나라를 구했다.

이후 정조 때(1776~1800년 재위) 정약용·홍대용·박제가 등 실학자들이 나라를 바꾸려고 노력한 것도 남명의 실사구시 사상과 궤를 같이한다. 시대를 건너뛰어 1920~1930년대 이병철(삼성)·구인회(LG)·허만정(GS) 같은 1세대 기업인들이 무더기로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국가적으로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리더십을 구축해야 한다”며 “기업가정신은 경제나 과학기술뿐 아니라 정치와 행정에도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말했다. 이우일 과총 회장 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은 “퍼펙트스톰 상황에서 위기 극복과 성장 동력 확충을 위해 정치권도 여야를 초월해 협치하며 국가 리더십을 하루빨리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장 “구동존이의 정치적 리더십 절실”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장. /서울경제 DB


“세계 주요국들이 리더십 부재로 고전하고 있으나 한국은 리더십 위기의 속도와 깊이·진통이 더 큽니다. 구동존이(求同存異·다른 점을 인정하며 공동 이익 추구)의 정치적 리더십이 절실한 때입니다.”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장은 12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공정과 상식’을 내걸고 정치에 뛰어들었고 취임식에서 ‘자유’를 수없이 외쳤다”며 “하지만 공정과 상식을 정책에 어떻게 반영할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할지 구체적인 방안이 없거나 설령 있다 해도 국민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학 교수인 신 소장은 리더십 불안정과 관련해 “조 바이든 대통령의 미국은 물론 새로운 총리(리즈 트러스)를 선출한 영국, 앙겔라 메르켈의 공백이 아쉬운 독일, 힘겹게 재선에 성공한 에마뉘엘 마크롱의 프랑스 모두 마찬가지이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라며 “하지만 한국의 리더십 위기는 더 심하다”고 진단했다.

윤 대통령이 구조 개혁을 차분히 실행해가더라도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냉엄한 성찰은 시급하다는 게 그의 주문이다. 신 소장은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고 구동존이의 자세로 국민과 야당을 설득할 수 있는 리더십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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