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짓처럼 보일지언정, 꿈꾸는 공상가는 필요하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예술가의 역할이 아마도 그런 ‘몽상(夢想)’ 아닐까.
화려한 카페트 위에 사내가 누워있다. 헬멧을 쓴 것으로 보아 ‘라이더’다. 달리던 오토바이에서 떨어진 것인지 넘어진 김에 잠시 쉬어가는 것인지, 다행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다. 권오상의 조각 ‘퓨즈(Fuse-s) 두카티’다. 육중하고 기념비적인 전통 조각에 문제의식을 품었던 권 작가는 가벼운 스티로폼에 다양한 각도로 찍은 사진 수백 장을 붙여 주변 인물이나 일상적 소재를 보여주는 자신만의 ‘사진 조각’을 구축했다. 페라리부터 두카티까지 슈퍼카와 바이크를 작품을 만들어 온 그가 라이더를 통해 질주 대신 잠시 멈춤의 상태를 보여준다.
조각이 몸을 뉘인 카페트는 방송 송출이 중단된 화면 조정상태의 이미지다. 김기라의 ‘멈춤-비비디바비디부, 내일은 검정’이다. 작가는 “미디어가 멈췄다는 것은 더이상 송출할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고, 이는 곧 세상의 종말과도 같은 것”이라며 “미디어의 멈춤을 카페트라는 다른 미디엄(매체)로 보여줬고, 이 앞에서 잠시나마 멈춰서는 안될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강남구 역삼동의 갤러리 두남재아트센터가 기획한 ‘기적과 잠꾸러기’는 권오상·김기라를 비롯한 유승호·정재호 등 중진작가 8인 그룹전이다. 참여작가들은 한때 X세대라 불렸던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중반 출생이라는 세대적 공통점을 가진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작가상과 송은미술대상 등의 수상 이력, 삼성문화재단 리움미술관과 두산아트센터 등의 기획전에 참여한 화려한 이력의 ‘미술관급’ 작가라는 점도 공통분모다. 전시 제목의 ‘잠꾸러기’는 예술가를 은유한 것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그들이 만든 작품은 더 나은 사회로 도약하는 교두보가 되어 ‘기적’을 이루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술시장을 휘어잡는 원로작가와 정책적 지원이 활발한 신진작가 사이에 ‘낀 세대’지만 한국미술의 발전을 이끌 ‘허리급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전시다.
홍경택은 2007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당시 한국작가 최고가인 7억원에 작품이 팔려 스타덤에 올랐다. 현란한 색채로 욕망을 표현해 온 작가가 이번 전시에는 무채색 바탕의 ‘손’ 연작을 통해 내적 대화를 보여준다.
극사실적으로 제작한 작은 인물상 연작으로 유명한 이동욱 작가는 요즘 재료의 본질을 파고드는 중이다. 암석과 금속, 얇은 백금으로 표면을 감싼 나뭇가지 등의 배치는 한 점의 풍경화나 정물화를 떠올리게 한다. 한참 들여다보면 작은 돌이 사람의 얼굴로 보일 정도로 상상력을 증폭시키는 신작이다. 최수앙 작가의 인물상은 피부의 촉감과 그 아래의 핏줄까지 생생하기에, 관람객을 깜짝 놀래키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최근작은 잘 빚은 조각을 콱 주물러 뭉개버린 듯 구상과 추상이 공존한다. 작가는 “예술을 하는 이유가 자유롭고 싶어서였는데, 형상의 재현에 내가 갇히는 듯해 이렇게 부수고 뜯은 실험적 작업을 통해 해방을 모색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종아리와 발만 남기고 납작하게 눌러버린 ‘언더 더 스킨’에서는 작가의 지문까지 찾아볼 수 있다.
등돌린 사람의 뒷모습과 손짓, 일상적 사물을 섬세하게 그리는 이진주, 도심 속에서 만나는 자연을 추상적으로 도려내 제시하는 이정배의 작품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전시는 10월30일까지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