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진행된 칩4 관련 첫 예비 실무 회의 자리는 사실상 한국·미국·일본·대만 등 칩4 참여국 간 ‘탐색전’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들은 모두 ‘반도체 강국’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경쟁 우위 분야가 각기 다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미국은 이날 칩4 회동에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를 대만과 한국에 90% 이상 의지해야 하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위해 자국 내 파운드리 기반 강화 등의 내용을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 측은 메모리반도체에서 보유한 압도적인 경쟁력 유지를 위해 주요 소재 및 장비의 공급 창구인 미국·일본과의 공급망 강화 방안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이날 예비 실무 회의는 사실상 상견례 자리라는 점에서 대략적인 큰 그림만 이야기했을 뿐 공급망과 관련한 구체적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정부는 이날 회동에도 불구하고 “(칩4 관련 회동 여부조차) 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관련 내용을 사실상 ‘일급비밀’처럼 다루고 있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칩4 실무 회의를 하루 앞둔 26일 기자들과 만나 “예비 회의 일정이 조율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사실상 모르쇠로 일관했다.
우리 정부가 칩4와 관련해 이 같은 로키를 유지하는 것은 중국에 나가 있는 우리 기업의 입장 때문이다. 정부는 칩4를 ‘동맹’이라고 하는 일부 언론에 ‘협의체’라는 표현을 써 달라고 요구하는 한편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중국을 의식해 칩4를 ‘4개국 회의’가 아닌 ‘4자 회의’라고 정정하는 등 중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실제 국내 기업들은 칩4 이슈가 나올 때마다 마음을 졸인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낸드플래시)과 쑤저우(패키징)에, SK하이닉스는 우시(D램)와 다롄(낸드플래시)에 각각 대규모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미 미국 정부는 중국에 있는 D램 생산 라인에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을 금지한 데 이어 낸드 라인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 기업의 중국 공장에서는 생산 최적화를 위한 투자 확대가 사실상 막혔다. 칩4를 가동도 하기 전에 이런 피해가 발생하고 있어 중국이 추가 몽니를 부릴 경우 우리 기업에 큰 피해가 불가피하다.
우리로서는 중국 측 설득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으로서는 칩4 내에서 우리 정부를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는 통로로 삼을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미국·일본·대만과 달리 한국은 중국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첨단 장비의 중국향 수출 제한과 같은 글로벌 규제에 한국이 오히려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며 “한국의 칩4 가입이 중국 내 반도체 수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중국 측에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중국도 최근에는 우리 정부의 칩4 가입에 이전보다 덜 반대하는 상황”이라며 “우리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라도 칩4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지난해 기준 한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 의존도는 미국(25.7%), 일본(25.0%), 네덜란드(25.0%) 순으로 미국이나 일본이 없으면 반도체를 만들 수 없는 구조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팀장은 “칩4는 실무자급의 다자 대화 창구이며 칩4 가입 시 미중 간 대립 사이에서 한국 기업이 중국에서 받을 수 있는 피해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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