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새 인스타그램을 통해 세계 미술계 유명인사가 된 인물(?)이 있다. 무려 12만 명의 팔로워를 가진 제리 고고시안(@jerrygogosian)이다. 실명은 아니다.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뉴욕 매거진(New York Magazine)의 유명 미술비평가 제리 솔츠(Jerry Saltz)의 이름인 ‘Jerry’와 세계 최정상 화랑인 가고시안 갤러리의 창업자 래리 가고시안(Larry Gagosian)의 성을 살짝 변형시킨 ‘Gogosian’을 합쳤다. ‘제리 고고시안’은 인스타그램에서 미술계 특유의 폐쇄적 특성들을 유머러스하게 비판하는 밈(Meme)으로 유명해졌다. 미술계 내부의 비밀을 직설적으로 폭로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메가 갤러리들과 아트 딜러들이 이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자기들의 낯간지러운 면을 긁어주는 제리 고고시안의 포스팅들에 대한 팔로워들의 반응은 몇 천 개의 ‘좋아요’를 얻을 만큼 뜨겁다. 보수적인 미술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이 제리 고고시안은 과연 누구이고, 어떻게 이 시대의 호응을 받고 있는 것일까?
한동안 익명으로 활동해온 제리 고고시안의 실체는 힐데 헬펜슈타인(Hilde Helphenstein)으로 밝혀졌다. 헬펜슈타인은 원래 LA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던 아트 딜러였다. 지병으로 운영하던 갤러리를 닫고 오랫동안 누워있어야 했던 그녀는 팬데믹 직전이던 2018년 후반, 폐쇄적인 미술계 내 자기비판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플랫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계정 제리 고고시안을 만들었다. 결론은 대성공이었다. 계정 생성 4개월 만에 팔로워 1만8000명을 확보했다. 팬데믹 기간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진 사람들의 소셜 미디어 사용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더 많은 팔로워 수를 얻었다.
온라인에서 활동해오던 제리 고고시안이 마침내 오프라인 세계에 공식 데뷔했다. 세계적 경매회사인 소더비(Sotheby’s)가 제리 고고시안에게 전시 큐레이팅을 제안했다. 지난 달 23일부터 10월3일까지 뉴욕 소더비 전시장에서 열린 특별전 ‘제안된 팔로워들: 알고리즘은 어떻게 항상 옳은가(Suggested Followers: How the Algorithm is Always Right)’이다. 출품작들은 1만 달러 안팎의 합리적 가격대였고, 기존 경매 입찰 방식과 달리 소더비 내 온라인 플랫폼 ‘Buy Now’에서 바로 구입할 수 있었다.
보통 전시는 큐레이팅 콘셉트 아래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선정한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제목대로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에 따라 제리 고고시안에게 추천된 아티스트들 중 선별돼 기획됐다. 추천된 작가들은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기는 하나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팔린다’는 수요 높은 인기 작가들은 아니었다. 이처럼 온라인 네트워킹 속 구성원들이 전시의 주체가 된 것은 현대미술 시장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익부 빈익빈과 양극화가 깊어지면서 덩치 큰 메가 갤러리들은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소셜 미디어에서도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막대한 팔로워를 보유한 갤러리들은 자신의 전속 작가를 소셜 미디어에서 홍보하고, 알고리즘에 따라 이들은 팔로워·컬렉터·미술 관계자들에게 노출된다. 물론 소셜 미디어의 순기능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알고리즘으로 계속 노출되는 아티스트들만 계속해서 주목받게 되는 현상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전문적인 미술비평가와 언론인들의 역할이 중요했다면, 현재는 작품에 관심을 보이는 일반 대중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러한 점에서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소더비가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 아바타에게 게스트 큐레이터로서 협업을 제안한 것은 흥미롭다. 몇 백억 대를 호가하는 대가와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을 취급하는 경매회사 소더비가 수익성도 미미한 이 같은 협업 형태의 전시를 기획한 이유는 뭘까? 이번 제리 고고시안과의 협업을 통해 드러낸 소더비의 색다른 마케팅 전략과 더불어 앞으로 미술계 내 큰 기관들과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와의 협업이 어떻게 확장될 것인지를 지켜보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뉴욕=엄태근 아트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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