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시장에 관심이 많으신 독자 여러분, 혹시 화학기계연마(CMP) 공정에 들어보셨나요?
CMP 공정은 노광, 식각, 증착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언급되는 반도체 공정인데요. 그래도 반드시 해야만 하고 상당히 중요한 8대 공정 중 하나입니다. 이 공정은요. 우리 일상 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포질'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사포질은 흔히 나무로 가구를 만들 때 거친 표면을 사포로 맨들맨들하게 만들어주는 작업이잖아요. CMP 역시 반도체 회로 공정을 하고 나서 표면을 반질반질하게 만드는 작업입니다. 한 개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 꽤 많은 CMP를 합니다. 칩 당 60~70번의 작업을 한다고 하죠.
자, 오늘은 CMP 공정 중에서도 핵심인 '슬러리'라는 소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슬러리(Slurry). 한마디로 아주 끈적한 액체죠. 근데 뭔가 느낌에, 있어 보이면서 중요해 보이는 용어같죠? 슬러리는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한번 씩 기사들에도 등장했던 반도체 소재이기도 한데요.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능도 참 재미있고, 우리 반도체 업계에 시사하는 점이 참 많은 소재이기도 합니다.
자 그럼, 우선 왜 슬러리가 대세인지 알아보기 위해 △CMP 공정의 컨셉 △슬러리 주요 성분 △슬러리 생태계와 극심한 해외 의존도 등에 대해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분량이 길어서 1,2편으로 나눴습니다. 제목에서 ‘알갱이’를 언급한 이유도 아래에 자세히 언급되니 함께 슬러리의 세계를 살펴 봅시다. 특히 케이씨텍(281820), 솔브레인(357780), 동진쎄미켐(005290) 등에 관심 있으신 투자자와 반도체 분야 취업 준비하시는 독자 여러분들께 이 글을 추천드립니다.
◇CMP 공정과 슬러리
CMP는 'Chemical Mechanical Planarization(또는 Polishing)'의 줄임말입니다. 한글로 하면 '화학적 기계적 평탄화' 라는 뜻인데요. 있는 그대로 해석을 하면 됩니다. 얇은 막을 쌓는 증착이나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는 식각을 끝낸 웨이퍼는 아무리 세밀하게 공정을 진행했더라도 웨이퍼 곳곳에 요철이나 굴곡이 남아있기 마련입니다. 엔지니어들이 이 표면을 보고 그냥 지나치진 않죠. 표면을 아주 빤빤하게 만들어서 보다 균일하고 완벽한 회로를 만드는 작업을 고안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나온 공정이 CMP입니다. 화학적인 방법으로, 또 동시에 기계적으로 웨이퍼를 평탄하게 만든다는 컨셉입니다.
통상 CMP 공정은 '폴리셔'라는 장비에서 진행하는데요. 폴리셔 구성은 대략 이렇습니다. 웨이퍼보다 훨씬 큰 사이즈의 CMP 패드를 가장 아래 배치합니다. 이 패드는 마치 까끌거리는 사포처럼, 웨이퍼 회로를 물리적(기계적)인 힘으로 갈아냅니다. CMP 패드 위에서 웨이퍼를 거꾸로 매달아 고정시킨 헤드(head)가 압력을 가하면서 박막이나 회로를 갈아내는 역할을 하죠.
제가 사포질에 비유해서 그렇지 CMP 패드는 웨이퍼를 상당히 미세하게 갈아냅니다. 어느정도냐면요. 웨이퍼 위에 쌓인 박막을 나노(㎚·10억분의 1m) 단위도 아닌 옹스트롬(Å·0.1나노) 단위로 갈아내야 합니다. 앞으로 회로 미세화는 더욱 가파르게 진행될테니 연마 역시 훨씬 세밀해야겠죠. 패드 표면의 마모율, 웨이퍼를 위에서 누르는 압력 등을 조정해서 연마 속도와 두께를 조율해야 합니다.
이제 오늘의 주인공인 '슬러리'를 설명할 차례인데요. 슬러리는 패드처럼 기계적으로 갈아버리는 게 아닌 '화학적'으로 연마를 담당하는 녀석입니다. CMP 패드 위에 슬러리를 똑똑 몇 방울 떨어뜨리면, 패드와 슬러리가 환상적인 궁합을 발휘하며 웨이퍼의 불필요한 굴곡들을 떼어냅니다. 아래에서 슬러리에 대한 핵심 포인트를 짚어보면서 어떻게 화학적 연마가 가능한지 분석해볼게요.
◇슬러리, 한두가지 종류가 아닙니다.
포털 사이트에 '슬러리'라는 단어를 검색해보시면 동의어로 '현탁액(縣濁滅)'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매달 현, 흐릴 탁, 액체 액'을 쓰는데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예시를 들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슬러리는 미세한 알갱이가 동동 떠 있는 액체를 말합니다. 가장 좋은 예시가 찜질방 단골 메뉴 미숫가루액입니다. 미숫가루액은 물에 각종 갈아낸 곡식 알갱이들이 녹지 않고 뻑뻑한 상태를 유지하는 액체죠. 목으로 넘길 때면 알갱이의 존재감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반도체 CMP 슬러리도 똑같습니다. 이 액체 속에는 연마를 기가 막히게 잘 해내는 알갱이가 동동 떠있는데요. 우리는 슬러리의 다양한 화학 성분 중에서도 웨이퍼를 갈아버리는 알갱이, 즉 슬러리 입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입자에 대해 보려면 CMP 슬러리가 어느 부분에 쓰이는지부터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들어가야 합니다. 아주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봅시다. 반도체 칩은 크게 △트랜지스터가 자리하는 회로부인 FEOL(Front End Of Line) △각종 배선이 위치한 BEOL(Back End Of Line) 등으로 나뉩니다. FEOL과 BEOL 쪽에 투입되는 슬러리 알갱이 종류가 최근에 갈리는 추세입니다.
먼저 FEOL에서는 세리아(CeO₂) 입자가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데요. 주목 받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드리겠습니다.
회로부 쪽에서 슬러리가 필요한 대표적인 공정은 '산화막' CMP 공정입니다. 수십억개 트랜지스터가 놓이는 자리에는 STI(shallow Trench Isolation)이라고 하는 칸막이가 있습니다. 이 칸막이는 각 연산 소자들이 서로 간섭을 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해요. 쉽게 말하면 독서실 칸막이같은 역할입니다.
그래서 STI는 통상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체 실리콘옥사이드(SiO₂)로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 STI 공정 중에는요. 트랜지스터가 놓여야 할 공간에 산화막, 질화막 등이 매우 복잡하게 쌓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평탄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걸 CMP 슬러리가 평탄화 작업으로 벗겨냅니다. 폭설 이후 차가 지나다니는 도로 위 눈을 걷어내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림을 참고해주세요.
세리아라는 녀석이 기존 STI CMP 공정에서 범용으로 쓰인 실리카 입자를 밀어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웨이퍼 위에 있는 산화막과 기가 막힌, 말그대로 '케미(chemi)'를 뽐낼 수 있기 때문인데요.
실리카 알갱이는 자기들이 갈아내버려야 할 산화막(SiO₂)과 같은 성분입니다. 화학적 결합 없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웨이퍼 표면을 깎아낼 뿐인데요. 반면 세리아는 다릅니다. 기계적인 힘과 더불어 '화학작용'이라는 어드밴티지가 붙습니다. 세리아 입자가 산화막에 다가간 순간, 세륨 표면의 세륨 이온, 산소가 산화막 표면에 있는 실리콘과 결합해 연마율(Removal Rate·RR)을 상당히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일각에서는 이걸 두고 화학적 이빨(Chemical Tooth)이라고도 합니다.
게다가 낄때 끼고 빠질때 빠지는 '낄끼빠빠'도 잘합니다. 산화막을 깎아내다가 질화막이 나타나면, 자동으로 연마를 멈추는 '오토 스톱' 능력까지 있습니다. 세리아가 섬세한 STI 공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 필수 요소인 셈이죠.
다만 세리아가 웨이퍼 표면에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다는 부작용도 발생하는데요. CMP 이후 세정 작업으로 말끔히 떼어낼 수 있다는 공정도 최근에 개발됐습니다.
그렇다고 실리카 슬러리의 가치가 낮아진 것은 전~혀 아닙니다. 배선(BEOL)부에서 각종 배선들을 평탄화할 때 상당히 각광받는 물질이 바로 실리카 슬러리입니다. 백엔드 쪽의 배선은 보통 전류들이 아주 잘 뛰어다닐 수 있는 구리, 텅스텐 등으로 만들어지는데요. 이 물질을 투박하면서도 아주 정확하게 깎아낼 수 있는 물질이 실리카 슬러리입니다. 마치 목욕탕에서 세신 전 온탕에서 때를 불리는 것처럼, 구리와 텅스텐을 산화시킬 수 있는 슬러리 속 산화제로 표면을 흐물흐물하게 만든 뒤, 실리카 입자 부대가 표면을 갈아내면서 평탄하게 깎아내게 됩니다.
이어지는 2편에서는 입자를 만드는 방법과 해외 의존도가 높은 슬러리 생태계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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