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3고(高)’ 불확실성이 극심해지면서 국내 자산 기준 상위 100대 기업의 외화 장기차입금이 6개월 사이 1조 5000억 원 가까이 늘어났다.
원·달러 환율이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지난 3분기와 오는 4분기 차입금까지 더하면 외화 차입금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환율이 가파르게 상승하며 위험성이 큰 단기차입보다 장기차입을 늘리려는 추세는 강해지지만 세계경제가 침체 국면에 접어들며 기업들의 부채 상환 능력이 점점 떨어지고 자금 조달은 더욱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는 경고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총 외화 차입금 6개월 새 8.7% 증가
16일 서울경제신문이 전국경제인연합회와 2022년 상반기(6월 기준) 자산 기준 100대 비금융 상장사의 재무제표를 분석한 결과 이들 기업의 외화 차입금은 지난해 10조 4019억 원에서 올해 상반기 11조 3075억 원으로 9056억 원(8.7%) 늘었다. 100대 기업의 외화 차입금은 지난해 이미 2020년(7조 6472억 원) 대비 2조 7500억 원가량 증가했는데 6개월 사이 9000억 원 넘게 추가적으로 불어났다.
그중에서도 외화 장기차입금은 올해 상반기 1조 4454억 원(35.32%)이나 증가했다. 올해 6월 기준 100대 기업의 외화 장기차입금은 5조 5370억 원으로 2020년 2조 8866억 원, 2021년 4조 916억 원에 이어 꾸준히 늘고 있다. 단기차입금은 보고 기간 이후 1년 이내에 만기가 도래하는 차입금을, 장기차입금은 1년 초과 기간 내 만기가 도래하는 차입금을 가리킨다.
외화 장기차입금이 급증한 주된 원인은 원·달러 환율의 급격한 상승으로 분석된다. 6월 종가 기준 원·달러 환율은 1298원 40전으로 지난해 12월(1188원 80전) 대비 9%가량 올랐다. 2020년 12월(1086원 30전)보다는 19.52% 상승했다. 추가적인 외화 차입금도 있지만 환율 상승에 따른 효과만으로도 부채가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이다.
고환율에 단기보다 장기 외화 차입금 늘려
지난달 월별 원·달러 환율(월간 평균)은 1392원으로 2009년 3월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1462원)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현재도 환율 상승세가 지속되며 연말까지 1500원대를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면서 올해 4분기 기업들의 외화 차입금 규모는 훨씬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들은 세계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특히 외화 단기차입금보다 장기차입금을 늘리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100대 기업의 외화 단기차입금은 지난해 5조 5310억 원에서 올해 5조 1566억 원으로 오히려 7%가량 줄었다. 외화 장기차입금 중 분할 상환 스케줄에 따라 일부 금액이 1년 이내에 만기가 도래하는 유동성 외화 장기차입금은 지난해 7793억 원에서 올해 상반기 6139억 원으로 21%가량 감소했다. 당분간 환율 상승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이자율이 높고 상환 부담이 큰 단기차입보다는 장기차입금을 선제적으로 늘리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상호 전경련 경제정책팀장은 “기업들 입장으로서는 지금까지 높은 금리, 환율 등 리스크가 커지며 돈을 장기로 빌리려고 해왔지만 이제 금융기관에서도 기업의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고 상환 기한을 길게 두지 않으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기업들의 곳간이 마르며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 보니 해외까지 차입금을 늘릴 수밖에 없다”며 “경기 침체 국면에 접어들면서 재고만 쌓이고 매출은 주는데 고정비는 그대로 나가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돼 부채의 질도 나빠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화학업종은 장기차입금 2배나 늘어
업종별로 보면 전기·전자와 화학 업계에서 올해 외화 장기차입금이 각각 27.12%, 100.23% 증가했다. 전기·전자 업계의 경우 지난해 1조 8612억 원이었던 외화 장기차입금이 올해 2조 3660억 원으로 늘었다.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 등 반도체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잇달아 단행하면서 조달한 외화 차입금이 환율 상승분만큼 늘어나고 각종 투자를 확대하며 추가로 조달한 외화 역시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프타를 비롯한 원재료를 수입하는 화학 업계는 특히 환율 상승에 따른 직격탄을 맞고 있다. 화학 업계의 외화 장기차입금은 지난해 4677억 원에서 올해 9365억 원으로 6개월 사이에 2배가량 폭증했다. 원자재를 사들여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일수록 올해 초부터 본격화된 원자재 가격 급등에 따른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석유화학 제품의 기초 원료로 사용되는 나프타 가격은 올 2월 초 톤당 837달러 수준이었지만 한 달 만에 1023달러로 뛰었다.
이밖에 운수 장비업의 외화 장기차입금은 올해 상반기 37.72%, 유통 업계는 290.70% 급증했다. 항공기를 들여오며 막대한 외화 차입금을 조달한 대한항공(003490)과 아시아나항공(020560)은 환율이 10원 오르면 각각 350억 원, 284억 원가량의 외화 평가 손실이 발생한다. 이들 기업은 원·달러 환율 상승으로 해외여행 심리까지 위축될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유통 업계도 각종 원자재·부재료, 운송료 등이 크게 뛰면서 외화 부채에 대한 부담이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건설업의 경우 외화 장기차입금 규모는 줄었지만 총 부채 대비 외화 장기차입금 비중은 3.1%로 모든 업종 중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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