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약탈자들이 초거대 UFO를 타고 나타나 많은 소형 UFO를 통해 세계 주요 도시를 공격한다. 곳곳이 폐허로 변하지만 지구인들의 반격은 UFO의 방탄막에 막혀 무력할 뿐이다. 이때 외계문명탐사연구소의 과학자가 UFO에 컴퓨터 바이러스를 퍼트려 방어막을 걷어낼 방안을 찾아낸다. 마침 미국 독립기념일(7월 4일)을 맞아 외계인들에게 대반격을 시도하는데….’
1996년 개봉한 공상과학(SF) 영화인 ‘인디펜던스 데이’의 줄거리다. 당시 해외 순방 중이던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이 영화를 먼저 보기 위해 개봉 전 필름을 공수해갔을 정도로 주목을 끌었다. 이달 15~16일 국민 메신저로 불리던 ‘카카오톡’과 포털 사이트 ‘다음’ ‘카카오페이’ ‘카카오모빌리티’ ‘업비트’ 등 주요 서비스가 먹통이 되고 17일에도 일부 여파가 이어지면서 순간 이 영화가 떠올랐다. 이 영화가 나올 당시에는 인터넷이 일반인에게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이라 모든 통신과 네트워크가 끊어지는 것에 대한 위험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초연결사회’와 같았으면 그 충격파는 훨씬 더 컸을 것이다.
이번 ‘카톡 사태’는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인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사이버 보안에 대한 인식과 준비 태세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줬다. 경기 판교의 SK C&C 데이터센터 화재로 인한 이번 사태에 대해 카카오 측이 “워낙 예상을 못 한 시나리오였다”고 밝힌 게 단적인 예다. 4년 전 서울과 경기 일부 지역의 대규모 통신 장애(KT)가 화재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어느새 잊어버린 것이다.
사이버 안보는 4차 산업혁명 시대 국가 인프라의 보호막이자 방패이다. 이번 화재의 원인이 된 데이터센터의 배터리 분야 기술 고도화는 물론 날이 갈수록 커지는 사이버 해킹 위협에 대한 대응이 필요한 이유다. 미국 등 주요 국가에서 육해공군 등 외에 새로운 안보 관점에서 사이버군과 우주군을 운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인터넷이 보편화된 지난 20여 년간 거의 매년 해킹 사건이 터졌다. 주요 사건만 꼽아봐도 2003년 인터넷 대란, 2011년 디도스 사태와 농협 해킹, 2012년 KT 개인정보 유출, 2013년 방송·금융 6개 사 서버 손상, 청와대 등 홈페이지 변조, 2014년 카드 3사 개인정보 유출, 2016년 국방부 전산망 침해, 2017~2018년 암호화폐거래소 탈취 등이 있다. 삼성 등 주요 기업들이 국제 해킹 그룹 랩서스로부터 정보를 탈취당하는 사례도 이어졌다. 만약 20~30년 뒤 자율주행차와 드론,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등이 보편화됐을 때 대규모 해킹 사태가 난다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다.
현재의 5세대(5G) 통신 시대를 넘어 6세대(6G) 통신 시대를 서둘러 준비하면서도 해킹이 안 되는 양자정보통신 등 양자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문제는 양자기술 같은 국가전략기술 중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시장을 선도하는 게 별로 없다는 점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2차전지 등은 선도군으로 봐준다고 해도 사이버보안·인공지능(AI)·수소·첨단로봇은 경쟁군, 양자기술·첨단바이오·우주항공은 추격군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가 중국보다 앞서는 것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OLED) 등 일부에 불과하다. AI·바이오·양자·우주항공·사이버보안·빅데이터·모빌리티·로봇 등에서는 우리가 뒤쫓아가는 형국이다.
염재호 SK 이사회 의장 겸 태재대 설립위원장은 “경제·안보와 과학기술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기술 패권 시대에 반도체 같은 초격차 기술을 10여 개만 확보한다면 전쟁을 억제하고 성장 동력도 확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실상 반도체조차 ‘반도체 굴기’를 표방한 중국에 언제까지 앞설 수 있을지 전혀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반도체 대국이던 일본의 몰락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때다. 미중 간 글로벌 패권 전쟁의 본질도 국가전략기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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