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통화 긴축이 장기화하며 시중 유동성이 고갈되자 기관투자가들이 현금 확보를 위해 주식·채권에 이어 알짜 부동산도 잇따라 매물로 쏟아내고 있다. 연기금과 공제회 등 기관투자가들은 3분기에만 2조 원이 넘는 빌딩들을 팔며 현금을 끌어모았고 이 같은 매도 행렬은 통상 부동산 거래가 뜸한 4분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어 자금 구하기가 어려워진 기업들도 상업용 건물과 오피스빌딩을 매각해 현금 쌓기에 분주하지만 자산 가격 하락이 본격화하면서 인수 측과 가격을 둘러싼 이견이 커져 거래가 불발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올 7월 코람코자산신탁 리츠(REITs)를 통해 보유하던 서울시티타워를 글로벌 사모펀드인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등에 4901억 원에 매도했다. 교직원공제회와 더케이라이프·신협 등이 주요 투자가로 참여한 이레빌딩 역시 비슷한 시기 3075억 원에 팔렸다. 사학연금·행정공제회·롯데손해보험 등이 보유하던 종로 플레이스도 3300억 원대에 삼성화재를 새 주인으로 맞았고 군인공제회가 갖고 있던 아스테리움 용산은 막판 매각이 진행 중이다.
연기금과 공제회·보험사 등 시장의 대표적 큰손 투자가들이 금리 상승과 긴축 기조가 길어질 것으로 예상되자 미리 유동성 확보에 나선 목적도 있다. 특히 교직원공제회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제회들은 올해 회원 대출이 급증하면서 유동성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 시중은행의 신용대출금리가 6~7%대까지 오른 반면 공제회는 아직 3~4% 수준으로 낮기 때문이다. 공제회의 특성상 자금 운용보다 회원들의 대출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우선순위에 있다 보니 당분간 시장의 ‘캐피털 콜(capital call·자금 요청)’을 거절한다는 기관들도 늘었다. 신규 투자를 최대한 미루면서 수년간 씨앗을 뿌려온 대체 투자에서 자금을 거둬들이며 현금 비축량을 늘리겠다는 의도다.
이들 기관은 만기가 돌아온 펀드를 연장하는 것도 최소화하고 있다. 시중금리가 치솟으면서 투자자산 매입 당시 체결했던 담보대출을 ‘리파이낸싱(자본 재조달)’할 경우 수익률 하락이 불가피해진 탓이다. 부동산담보대출의 바로미터가 되는 3년물 금융채금리는 이달 25일 기준 5.859%로 8월 초(4.284%) 대비 1.6%포인트나 급등했다.
기관투자가들이 연말을 앞두고 수익률 관리에 들어간 것도 알짜가 된 빌딩 등 부동산을 내다 파는 배경이다. 글로벌 금리 인상 와중에 국내외를 막론하고 주식과 채권 등 전통 자산의 투자수익률은 크게 떨어졌다. 실제 국내 최대 기관인 국민연금은 6월 말 기준 기금 운용 수익률이 -8%에 달하며 76조 6600억 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주식과 채권에서 각각 65조 1700억 원, 20조 5800억 원의 손실이 발생했지만 부동산 등 대체 투자에서 9조 900억 원의 수익을 내면서 손실을 일부 줄였다.
투자은행(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체 투자의 경우 주식과 채권처럼 수시로 시가 평가를 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자산을 매각하거나 펀드를 청산하고 수익을 확정한다”며 “올해 매각한 자산의 경우 대부분 몸값이 오르기 전인 2018~2019년에 매입한 것들이어서 지금처럼 자산가치가 폭락하는 시기에 수익률을 방어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기관들뿐 아니라 대기업도 자산을 유동화해 곳간에 현금을 쌓고 있다. 회사채 시장을 통한 돈줄이 마르면서 채무 상환과 투자 등 운영자금 확보에 빨간불이 켜졌기 때문이다. 한라홀딩스는 지난달 판교에 위치한 만도 글로벌R&D센터를 한라운용리츠에 4000억 원에 매각했다.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랜드그룹도 NC백화점과 뉴코아아울렛 등 보유하고 있는 상업용 자산을 이리츠코크렙에 추가 매각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삼성생명과 한화생명은 자본 확충과 더불어 자산 건전성 확보를 위해 부동산 처분에 나섰다. 삼성에프엔리츠와 한화리츠를 각각 설립해 보유 중인 사옥과 투자 부동산 등을 리츠에 넘겨 대규모 현금을 마련할 계획이다.
그러나 기관과 기업들의 부동산 매각 계획이 예상대로 순항할지는 미지수다. 다음 달에도 기준금리 인상이 단행될 것이 확실시되고 레고랜드발 단기자금 시장 경색이 부동산 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어서다. 금융비용이 높아지면서 매도자와 인수자 간 가격에 대한 이견이 커져 딜이 무산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올해 최대 딜로 관심을 모았던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IFC)를 비롯해 명동 화이자타워, 수서 로즈데일빌딩 등이 매물로 나왔다가 거래가 불발된 바 있다.
서울 광화문의 콘코디언빌딩(옛 금호아시아나 사옥)의 경우 매각 입찰이 흥행에 실패해 가격이 떨어지기도 했다. 콘코디언을 보유한 DWS자산운용은 입찰에 앞서 매각가로 7000억 원가량을 요구했으나 인수 후보가 3곳에 불과했고 제시한 가격도 목표치에 크게 못 미쳐 다른 원매자를 찾는 한편 당초 기대했던 매각가 역시 200억 원가량 낮춘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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