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색이 아주 곱지요? 붉을 단(丹) 자에 단풍 풍(楓) 자를 쓴 단풍나무는 이름부터 가을을 뽐내는데, 이건 단풍나무가 아니라 ‘복자기’입니다. 단풍나무의 한 종류이기는 하지만, 붉은 색 위주의 단풍과 달리 붉은 색을 바탕으로 진한 주홍색을 보태 더욱 화려하죠. 우리가 흔히 ‘만산홍엽’이라고 할 때의 홍엽(紅葉)은 분명 복자기일 거예요. 청와대에서 자라는 복자기 중 한 그루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6년에 기념식수한 나무죠.”
가을이 흠뻑 내려앉은 청와대 녹지원에서 용충교를 건너 본관으로 향하는 길에서 ‘나무 박사’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가 말했다. 25일 청와대에서 만난 박 교수는 “청와대에는 5만5000여 그루의 나무가 살고 있고, 저마다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들도 많다”면서 “팻말이나 기록 같은 게 있으면 좋을텐데 아쉽다”고 말했다. 그래서 작정하고 내놓은 책이 신간 ‘청와대의 나무들’(눌와 펴냄)이다.
지난 5월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에 맞춰 국민에게 개방된 청와대는 축구장 36개 넓이에 해당하는 25만3505㎡ 면적에 영빈관·본관·상춘재 등 주요 건물을 품고 있다. ‘금단의 땅’이었기에 국민적 관심은 우선 대통령 관저와 주요 건물에 쏠렸지만 진짜 볼거리는 녹지원과 대정원 등에 분포한 나무들이다. 청와대 자리가 고려 때 남경 행궁의 자리였고,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후원이었기에 그 자리를 지켜온 나무들은 산업화 시대를 지나면서도 청와대 안에서 곱게 보존될 수 있었다.
서울대 임학과를 졸업한 농학박사 출신의 박 교수는 어떻게 ‘은밀한’ 청와대의 나무들까지 잘 알게 됐을까? 그는 “2019년 당시 대통령경호처의 의뢰를 받아 자료집 성격으로 ‘청와대의 나무와 풀꽃’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던 것이 계기”라며 “그 때는 개방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고, 현장 답사와 집필 과정에서도 엄격한 보안사항을 지켜야 하는 제약이 따랐지만 이렇게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보안구역 지도까지 관람동선을 고려해 넣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청와대를 △영빈관과 본관 △녹지원과 상춘재 △관저와 침류각 △기마로와 성곽로 등 4개 권역으로 나눠 통행로를 따라 85종을 선정해 책에 수록했다.
눈여겨볼 나무들은 대통령의 기념식수다. 박 교수는 집필 과정에서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이승만 기념식수인 전나무를 발굴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애견 해피를 데리고 기념식수하고 있는 1960년3월25일자 국가기록원 흑백사진을 근거로 찾았다”면서 “사진 속 나무는 10살 정도의 전나무인데 오늘날 상춘재 옆 계곡에서 키 25m의 70살 수령의 나무로 자랐다”고 설명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오동나무·모감주나무 등 많은 나무를 심었지만 살아남은 나무는 1978년 영빈광 준공기념으로 “한겨울에 언 땅을 파고 심은” 가이즈카향나무 뿐인데 현재 104살이나 됐다. 그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구 달성군 군락지에서 가져다 심은 이팝나무는 소복한 쌀밥같이 생긴 꽃 모양을 통해 보릿고개를 극복한 부친의 업적을 떠올리게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 식목일에 맞춰 본관 앞에 구상나무를 심었고,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첫해 무궁화를 기념식수했다. 본관 앞쪽에서는 이 나무들을 모두 볼 수 있다.
청와대 나무들 중 반송·회화나무·용버들 등 크고 나이 많은 나무 6그루가 지난 9월 ‘청와대 노거수군’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박 교수는 “청와대에는 대통령 기념식수인 20종 33그루 뿐만 아니라 255살 된 회화나무를 비롯해 100살 넘은 고목들도 43그루나 된다”면서 “거대한 식물원 같은 청와대에서 역사와 자연을 함께 음미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