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이 2025년까지 약 100억 달러(약 14조 2000억 원) 비용 감축 계획을 발표하는 등 반도체 빅테크들이 연이어 업황 악화에 대비한 긴축 경영을 선언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빅5’ 기업 중 유일하게 감축·감산 없는 공격적인 투자를 선택했다. 10여 년 전 풍부한 자본과 생산 규모, 기술 경쟁력을 앞세워 메모리 ‘치킨게임’에서 리더십을 지킨 방식을 올해에도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27일(현지 시간) 인텔은 3분기 실적 발표회를 통해 내년에 운영 비용 중 30억 달러(약 4조 3000억 원)를 절감하고 2025년까지는 80억~100억 달러 규모의 운영 예산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올해 설비투자 계획도 수정했다. 데이브 진스너 인텔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올해 초 270억 달러 설비투자액을 계획했지만 현재 210억 달러 규모로 조정했다”고 밝혔다. 기존 대비 약 8% 정도 축소한 수치다.
최근 인텔 외 글로벌 반도체 매출 빅5 기업들이 예산 감축이나 투자 축소를 연달아 발표하고 있다. SK하이닉스와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러지는 내년 설비투자액을 기존보다 각각 50%, 30% 이상 감축한다고 발표했다. 대만 TSMC는 올해 설비투자를 계획보다 10% 정도 축소한다고 전했다. 물가 상승으로 인한 정보기술(IT) 수요 둔화, 반도체 다운 사이클에 대응하기 위해 미리 계획했던 투자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모양새다.
다만 빅5 중 삼성전자만 유일하게 정반대 행보를 걷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 역시 업황 악화로 3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46.3%나 깎인 5조 1200억 원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올해 반도체 설비투자에만 47조 7000억 원을 쏟아부을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역대 최대 연간 반도체 설비투자 규모다.
또한 한진만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27일 3분기 실적 발표회를 통해 인위적인 감산은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달 초 미국 실리콘밸리 ‘삼성 테크 데이’ 행사에서 내비친 반도체 투자에 관한 회사 기조에 변함이 없음을 강조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에서도 감산이나 투자 축소를 고려하지 않는다. 반도체 제조 공간(클린룸)을 미리 지어놓고 고객사 수요에 대응하는 이른바 ‘셸 퍼스트’ 전략을 위해 평택, 미국 테일러 인프라에 꾸준히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삼성전자가 업계 불황에도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할 수 있는 배경에는 크게 △생산 규모 △풍부한 자본 △원가 경쟁력이 꼽힌다. 삼성은 세계 메모리 시장에서 D램은 41.1%(12인치 웨이퍼 기준 월 약 67만 장), 낸드플래시는 36.6%(월 약 65만 장) 생산 규모를 가지고 있다. 제조 설비 구축이 중요한 반도체 산업에서 거대한 생산 인프라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삼성전자가 상당한 우위를 확보한 셈이다.
또 삼성전자가 보유한 120조 원 현금(금융 상품 포함)은 불황에도 적극적인 투자를 받쳐 주는 든든한 자산이다. 6월 3㎚(나노미터·10억 분의 1m) 파운드리 세계 최초 양산, 극자외선(EUV) 기반 D램, 128단 저장 공간을 한번에 쌓을 수 있는 낸드 공정 등 원가를 낮출 수 있는 다양한 첨단 기술로 투자 리스크를 상쇄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또한 삼성전자의 자신감은 2000년대 잔혹했던 글로벌 메모리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았던 경험에서도 우러나온다. 2001년에는 시장을 휘어잡고 있던 마이크론과의 가격 출혈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2000년 18.9%였던 D램 시장 점유율을 2002년 33.1%로 끌어올렸다. 2008년 또다시 벌어진 메모리 공급 과잉 현상에서도 생존했다. 삼성전자는 이 당시에도 20㎚ D램 원가 경쟁력과 생산 규모를 기반으로 버텨냈고 라이벌 업체인 독일 키몬다, 일본 엘피다를 2009년과 2012년 차례로 쓰러트렸다. 이후 삼성전자는 D램 시장에서 40%가 넘는 점유율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김영우 SK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최근 리포트를 통해 “삼성전자는 규모의 경제, 원가 경쟁력, 현금성 자산 측면에서 감산할 필요가 없으며 유동성 걱정도 없고 오히려 인수합병(M&A) 기회도 찾아볼 만한 절호의 기회”라며 “‘메모리 경쟁사 대비 ‘나 혼자만 레벨업’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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