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이 우거진 대지에 집을 지었다. 실측을 되풀이했지만 건축 과정에서 나무와 지붕이 맞물렸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건축주는 나무를 보존하기 위해 지붕 일부를 도려내는 길을 택했다. 제주 한림읍 명월리에 있는 건축물 ‘잔월’의 이야기다.
잔월이 자리한 명월리는 유서 깊은 고을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던 명월성지와 명월대가 남아 있으며 500년을 산 팽나무 군락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이곳에 6인용 숙박시설을 짓기로 했을 때 건축주는 공간의 기억을 존중하기로 했다. 사람보다 오래 산 나무 군락, 그 대자연의 시간 속에 녹아든 우리 역사의 숨결을 건축물에 녹여내기로 했다. 시공 과정에서 오래된 수목의 나뭇가지 한 가닥이 지붕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 뻗쳐 있음을 자각햇을 때 나뭇가지 대신 건축물의 일부를 포기한 배경에는 이 같은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잔월은 전통과 현대의 결합체다. 잔월 중심부에는 한옥의 누각을 참조해 만든 대청마루가 있다. 우리 건축물의 마루가 으레 그러하듯 이 대청마루는 건물 내외부를 잇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오랜 역사를 가진 고을의 정서와 그곳에 새로이 들어선 건물이 내포한 기운이 마루라는 공간을 통해 끊임없이 교류하고 뒤섞인다. 건물 내부는 다분히 현대적이다. 일부 공간이 노출 콘크리트로 구성돼 있으며 커다란 통 유리창이 벽면을 채우고 있다. 잔월은 예스러움과 세련됨이 서로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동질성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해낸다.
숙박시설로 지어진 이 건축물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짓는 동시에 사람과 자연을 이으며, 사람과 사람 또한 잇는다. 건물을 찾은 외지인은 마을의 정서를 담은 건축물을 통해 주변 환경과 교류하게 되며 동시에 한편으로 지극히 사적으로 설계된 공간 속에서 투숙객 간의 내적 소통 또한 경험하게 된다. 열린 공간이자 닫힌 공간이라는 특성을 동시에 가진 이 건물은 우리 역사의 흔적과 자연의 호흡, 사람의 숨결을 한 공간에서 느끼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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