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30대 직장인 이 모 씨는 지하철 9호선을 탈 때마다 불안감을 느낀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지하철을 타고 있자면 최근 뉴스를 통해 본 이태원 참사의 끔찍한 장면이 떠오르면서 ‘나도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걱정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울 용산구에 사는 20대 여성 박 모 씨는 연일 들리는 이태원 참사 소식에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식사도 거르기 일쑤다. 또래의 죽음을 보면서 생긴 무력감과 우울한 기분이 박 씨의 생활조차 흔들고 있는 셈이다.
이태원 참사를 직간접적으로 겪은 국민들이 ‘대리 외상(간접경험에 의한 불안 증상)’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유가족은 물론 사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156명의 젊은이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본 국민들의 ‘심리적 충격’도 클 수 있다며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정찬승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홍보위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은 “서울 한복판에서 사고가 벌어진 데다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사진·영상이 여과 없이 유포되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가뜩이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생존자와 유가족들을 향한 비난과 혐오 표현을 자제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백명재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총무위원장(경희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도 “현장에 있지 않았더라도 충격적인 영상과 사진을 반복해서 시청하면 큰 충격을 입을 수 있어 자제하는 것이 좋다”며 “외상으로 인해 평소와 현저히 다른 행동을 보이고 수면 장애, 충동적 행동, 감정 조절의 어려움 등이 지속된다면 전문가에게 상담과 도움을 받도록 연계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SNS 등으로 퍼지고 있는 사고 사진·영상을 지속적으로 접할 경우 심리적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유가족·부상자에게 비난 등이 가해질 때 충격이 배가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부상자 등 1000여 명을 고위험군으로 보고 심리 지원을 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2018년부터 운영 중인 국가트라우마센터와 서울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소속된 전문가 80여 명 외에 대한신경정신의학회·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한국심리학회 등 민간 학회에서 50여 명이 투입된다. 서울시 정신건강복지센터는 지난달 31일부터 서울 내 합동 분향소 2곳(서울광장·녹사평역광장)에 심리 지원 상담소를 마련했다. 실신하거나 쓰러질 정도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센터 소속 정신건강 요원들이 현장에서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다만 전문가들은 개인의 심리 치료는 한계가 있는 만큼 국가가 장기적으로는 재난 정신건강 서비스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9·11 테러와 동일본 대지진 등 대규모 재난 상황을 경험한 미국과 일본은 참사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정신건강 서비스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일본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등 대규모 자연재해에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전국적인 중앙 컨트롤타워 기능을 갖추기 위해 국립재난정신건강정보센터·재난정신의료지원팀·재난정신보건의료정보지원시스템 등을 신설해 운영 중이다. 미국 역시 2001년 9·11 테러 이후 연방재난관리청(FEMA)이 직접 재난 대응과 심리 치료를 담당해 국가적 차원에서 정신건강 서비스 시스템을 구축한 상태다. 안용민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국립건강정신센터 등 컨트롤타워를 중심으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때를 대비한 매뉴얼을 만들 필요가 있다”며 “심리 지원 치료는 상당히 전문적인 분야인 만큼 재난 정신건강 서비스 체계를 상설화해 전문인력을 육성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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