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연 호수 위에 달들이 여럿 떠 있는 듯합니다.”(현대미술가 이우환)
최근 한국을 다녀간 작가 이우환은 용산구 한남동 삼성문화재단 리움미술관에서 20일까지 열리는 박영숙의 백자 전시 ‘여월지항(如月之缸)’을 보고는 이같이 감탄했다. 거장의 말처럼, 리움에 달이 떴다. 달처럼 보이는 달항아리가 모두 29점이다. 그 중 다섯 점은 박영숙이 빚은 달항아리에 이우환이 붓질 더한 콜라보레이션 최신작이다.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을 바람 닮은 이우환의 붓질이 어루만지고 감싸 안은 듯하다.
우리 전통 공예의 현대화를 통해 동시대 미술과의 연결지점을 찾고자 하는 리움의 노력이 적극 행보를 보이고 있다. 박영숙 도자전이 그 중 하나다. 그간 고미술 전시장(M1)에서만 선보였던 도자 전시를 현대미술 상설전시장(M2)에서 연 것부터가 심상치 않다. 사방 벽이 백자색처럼 새하얀 공간에, 반투명한 원기둥 형태의 좌대 위에, 아슬아슬 백자들을 배치했다. 유리덮개도 씌우지 않았고, 천장의 조명이 백자표면에서 그대로 일렁이게끔 전시했다. 역발상적 전시방식을 통해 현대미술의 가능성을 백자에서 찾으려 한 시도로 풀이된다.
조지윤 리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는 “박영숙 작가의 달항아리는 조선시대 17세기 후반부터 만들어진 백자 전통에서 출발하지만, 티 없이 맑은 백색과 70㎝에 달하는 장대한 크기의 백자를 새롭게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특성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경주에서 나고 자란 박영숙은 유물 수집차 경주를 찾은 최순우·진홍섭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을 쫓아다니며 안목을 높였다. 취미 도예가에 불과했던 그를 찾아온 이우환이 ‘제대로 배워보자’고 독려한 이후 불맛, 흙맛, 흰맛을 알게 됐다. 1999년 방한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그를 만났고, 2012년에는 그의 달항아리가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의 ‘최고 컬렉션’으로 꼽혔다. 박영숙의 백자가 현대미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이유는 선배 작가들과의 협업이다. 조 수석큐레이터는 “달항아리를 캔버스 삼은 회화작업 등 다양한 협업을 통해 현대미술의 매체로서 백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왔다”고 말했다. 조선의 달항아리는 높이 50㎝를 넘기기도 어려웠지만 박영숙은 이번 전시에 최대 86㎝에 달하는 백자도 선보였다. 작가는 “옛 도공들의 이상이 가장 크게, 가장 둥글게, 가장 하얗게 만드는 것이었건만 여러 여건 때문에 이루지 못했고, 과학기술이 발전한 지금은 그 힘을 빌어 이상을 실현하는 게 도공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한다. 전시 제목 ‘여월지항’은 ‘시경(詩經)’에서 ‘상현달이 보름달로 차오르듯’ 평안을 기원하는 구절인데, 상현달을 뜻하는 ‘항(恒)’을 항아리 ‘항(缸)’으로 바꾼 것이다.
리움의 M1에서는 전통을 기반으로 한 공예작가들의 작품이 ‘공예 지금’이라는 제목으로 고미술 소장품과 함께 선보이고 있다. 박서보·정상화 등의 ‘단색화’와 아니쉬 카푸어·바이런 킴 등의 작품을 고미술과 함께 선보인 바 있지만, 현대공예와의 접목은 새로운 시도다. 4층에는 디자이너 김백선과 소목장 조석진이 생전에 함께 제작한 ‘심재(心齋) 4’가 놓였다. 자연의 나뭇결과 선을 구현한 서랍장이 흙으로 빚은 청자와 어우러져 평온함을 준다. 3층의 분청사기는 그릇 모양 금속기 표면을 투박한 문양으로 촘촘히 채운 조성호의 작품과 어우러졌다. 전통 오방색을 옻칠 방식으로 표현해 색채 향연을 보여주는 정해조의 작품은 2층 수묵화와 채색화들까지 새롭게 보게 한다. 다양한 시대의 금속 유물이 있는 1층은 디자이너 정구호와 금속 장석 장인들이 협업한 ‘백골동’이 차지했다. 현대 소재인 아크릴 외형에 전통을 보여주는 평양 반닫이 장석 장식을 덧붙여 현대적 재료와 오래된 전통이 결합한 현대 공예의 진화를 보여준다. 내년 1월29일까지.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