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억 달러 규모에 달하는 흥국생명의 외화 신종자본증권(영구채) 조기 상환(콜옵션)이 예정대로 9일 이뤄진다.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행사가 외화채권시장에서 코리안페이퍼(Korean Paper·한국물)의 신뢰도를 떨어뜨리자 금융 당국이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상환 자금은 흥국생명의 환매조건부채권(RP)을 4대 시중은행이 매입하는 방식으로 마련될 것으로 알려졌다.
7일 보험 업계에 따르면 흥국생명은 신종자본증권 5억 달러(발행 당시 약 5571억 원) 가운데 4000억 원을 RP 발행 자금으로 충당할 예정이다. 4대 시중은행과는 RP를 매입하되 수수료를 조금 높게 계산하는 방식을 논의하고 있다. 나머지 1000억 원은 보험사들의 대출로 조달된다. 여기에 태광그룹의 자구책 마련 노력도 포함된다. 태광그룹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본 확충을 지원하기로 했다. 당초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 등은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행사와 관련해 자금 상황 및 해외채권 차환 발행 여건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지난주 해외채권시장에서 흥국생명 콜옵션 불발 사태의 후폭풍이 코리안페이퍼에 직접 영향을 미치자 긴박하게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보험 업계 고위 관계자는 “지난 주말 동안 대통령실에도 보고되는 등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대책 수립이 진행됐다”고 밝혔다.
흥국생명에 이어 DB생명도 이달 13일로 예정된 300억 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행사를 내년 5월로 연기했지만 자체 자금으로 정해진 일정대로 상환할 예정이다.
흥국생명이 사실상 디폴트(채무 불이행)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미행사를 선언한 것은 현금성 자산이 부족했다기보다 숲을 보지 못하고 자기 앞의 나무만 본 결과다. 콜옵션 연기에 따른 스텝업(금리 인상)보다 더 높게 금리를 주고 신종자본증권을 새로 발행하기보다 콜옵션 미행사를 선택한 것이다. 여기다 두 달 뒤면 사라질 지급여력(RBC) 규제도 영향을 미쳤다. 추가 자본 충당 없이 콜옵션을 행사하면 자칫 RBC비율이 150% 밑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흥국생명 입장에서는 실리는커녕 금융시장의 불안감만 자극했고 내년 콜옵션 행사를 앞둔 보험사들도 자금 조달에 실패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키웠다.
흥국생명은 이 날 조기상환을 위한 자금을 자체 자금과 환매조건부채권(RP) 발행 등으로 마련하기로 결정하며 시장혼란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흥국생명 고위관계자는 "조기상환 자금 대부분은 자체 보유 자금으로 마련할 계획"이라며 "그룹 차원에서 증자 등의 후속조치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흥국생명 측은 “(모기업인) 태광그룹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본확충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흥국생명의 5억 달러 규모의 외화 신종자본증권 조기 상환 연기 쇼크는 예상보다 컸다. 흥국생명 입장에서는 페널티가 부과돼 현재 4.475%인 금리가 연 6.742% 수준으로 높아진다고 해도 12%가 넘는 새 신종자본증권의 금리보다는 유리해 실리를 택했다고 하지만 시장 신뢰에 대한 타격은 예상보다 컸다. 콜옵션 미행사 이후 은행·보험사들이 발행한 한국물 외화표시채권 가격이 급락하고 거래절벽 수준으로 거래가 위축됐다. 급기야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4일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미행사로 한국 보험사들의 자금 조달 여건이 악화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금융 당국으로서는 레고랜드발 단기자금 시장 경색에 이어 외화 채권시장의 신뢰 추락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판단에 환매조건부채권(RP)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로 상환을 맞추는 카드까지 꺼낸 것으로 풀이된다. 주말 동안 금융감독원 직원들은 출근해 야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상환을 위해 4대 시중은행은 4000억 원 규모의 RP를 매입할 계획이다. 나머지 1000억 원은 보험사들이 대출하는 방식으로 참여하며 여기에 흥국생명의 모회사인 태광그룹의 자구책 노력도 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RP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은 3일 개최된 생명보험 업계와의 간담회에서 이미 예고됐다. 당시 보험사 관계자들은 RP 등 차입을 통한 유동성 확보가 가능한지 금융위원회에 유권해석을 요청했고 금융위는 ‘후순위채권·신종자본증권 중도 상환을 위한 PR 매도, 차환 등 일시적 차입 금액은 보험업법시행령 제58조(자산 평가의 방법 등) 제3항에서 정한 발행 한도에 산입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시중은행의 RP 매입과 보험사들의 참여가 가능하도록 했다.
흥국생명이 외화 신종자본증권 조기 상환 미이행을 결정한 것은 돈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흥국생명의 올 6월 말 기준 자기자본은 1조 9718억 원이다. 재무 건전성 지표인 지급여력(RBC)비율에서 지급 여력을 나타내는 가용자본은 이보다 더 많은 2조 7734억 원이다. 조기 상환 금액으로만 보면 가용자본의 25% 수준이다. 여기다 흥국생명의 책임준비금적정성평가(LAT) 잉여액은 6월 말 기준 4조 4481억 원에 달한다. 현금성 자산도 풍부하다. 지원군이 돼줄 대주주도 있다.
결국 흥국생명이 콜옵션을 연기한 가장 큰 이유는 새로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하면 금리가 워낙 높은 만큼 실리를 따진 것으로 풀이된다. 흥국생명은 당초 3억 달러(외화)와 1000억 원(원화)의 신종자본증권을 찍어 이달 9일 만기 콜옵션을 충당하려 했다. 그러나 수요가 거의 없었고 금리 역시 콜옵션 연기에 따른 스텝업 조항보다 높았다.
RBC비율 규제도 콜옵션을 연기한 이유로 꼽힌다. 보험업 감독 규정에 따르면 자본성 증권의 콜옵션은 이를 상환한 뒤에도 RBC비율이 150%를 넘어설 때만 가능하도록 돼 있다. 흥국생명의 6월 말 기준 RBC비율은 157.8%다. 고금리가 지속되면서 3분기에는 대부분 보험사들의 RBC비율이 더 악화됐다. 자본 확충 없이 콜옵션을 행사해 자본을 태우면 RBC비율이 150%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국내 금융기관의 신종자본증권 조기 상환이 연기된 것은 2009년 우리은행 후순위채 이후 1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던 만큼 흥국생명 콜옵션 연기가 시장에 미치는 타격도 컸다. 국내 은행과 보험사들이 발행한 신종자본증권 가격은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상환 발표 이후 연일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내년 8월 조기 상환일이 도래하는 신한금융지주 신종자본증권 가격은 이달 4일 기준 1주일 전보다 8.9% 하락했다. 같은 기간 내년 10월 조기 상환일을 맞는 우리은행 신종자본증권 가격이 11.1%, 2025년 9월 만기인 동양생명 신종자본증권 가격은 37.2% 떨어졌다. 한국신용평가는 2일 보고서를 통해 “대부분의 보험사 신종자본증권이 콜옵션 행사를 고려해 발행·유통되고 있는 점을 보면 흥국생명의 이번 콜옵션 미행사는 투자자의 이 회사에 대한 펀더멘털에 대한 신뢰도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며 “이에 흥국생명이 시장 신뢰를 회복하기까지 일정 시간이 소요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또 “나아가 보험사 신종자본증권에 대해 전반적인 수요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시장 일각에서는 흥국생명의 모회사인 태광그룹이 바이백을 실시해 시장 안정화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바이백은 채권 발행자가 시장에서 해당 발행 채권을 사들여 만기 전에 미리 돈을 지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태광그룹이 이달 9일 이전에 자사의 자금을 활용해 해당 채권을 사들여 글로벌 투자가들의 한국 채권에 대한 수요 감소 우려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흥국생명은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지분 56.3%를 보유한 최대주주이고 대한화섬과 티엔알 등 태광그룹 계열사들도 일부 지분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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