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앞선 의료기술을 자타가 공인하지만 의료기기와 의약품은 외국산에 의존해 오히려 국부가 빠져나가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이제는 혁신 의료기기나 신약 개발을 위해 의학과 공학이 융합하는 혁신 생태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공학한림원과 대한민국의학한림원·서울경제가 함께 14일 조선호텔에서 진행한 ‘엔데믹 시대, 의학과 공학의 융합 혁신 생태계’를 주제로 한 특별 좌담회에서 왕규창 의학한림원장은 “의료기술은 앞서 있지만 초고령시대를 앞두고 국부 창출은커녕 유출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왕 원장은 “월 500만 원의 고가 외국 항암제도 건강보험에서 지원하는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겠느냐”며 “의료 노하우를 활용해 혁신 의료기기를 비롯해 신약까지 내놓아야 하는데 벤처·스타트업뿐 아니라 대기업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삼성전자의 전 CEO(최고경영자)가 현역 시절 ‘여러 규제도 있고 시간도 걸리는데 의료기기는 하지 말라’고 했던 일화를 전하며 대기업이 바이오헬스 기기에 제대로 뛰어들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권오경 공학한림원 회장은 “(감염병이 끊이지 않는) 엔데믹 시대에 공학·의학 간 칸막이를 열고 산학연정이 융복합 제도 개선과 혁신 생태계 구축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공학한림원이 의학한림원과 함께 최근까지 코로나19 특위를 가동해 산업·의학·공학 협력 방안을 모색한 데 이어 올해 공학한림원 내 바이오메디컬분과위원회를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권 회장은 “의학과 공학이 손잡고 실효성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며 “매사추세츠공대(MIT)·하버드의대 HST(건강 과학기술) 프로그램을 보니 과학과 기술을 접목해 의과학자를 적극 양성하는데 한국에서도 이렇게 패러다임 전환을 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권성훈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우리나라는 의료 경쟁력이 높아 다른 나라에서도 같이 연구를 하고 싶어 한다”며 “하지만 서울대병원조차 연 1000억 원씩 10년을 투자해야 의료와 연구가 같이 가는 연구 중심병원으로 바뀔까 말까인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공학계와 의학계를 비롯해 산학연병이 합심하면 정보기술(IT) 발전을 토대로 창업 활성화를 꾀하고 데스밸리를 넘는 기업도 많이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실제 그는 의대와의 융합연구를 통해 패혈증 환자에게 항생제를 빨리 찾아주는 기술을 개발해 지난해 건강보험 수가 적용을 받아 병원들에 적용하고 있다.
권 교수는 우리 의료 현장의 수가가 낮아 혁신 의료기술이 먼저 들어오기 쉽지 않다며 동남아까지 묶는다면 테스트베드를 만들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혁신 의료기기의 테스트베드 역할을 하던 유럽이 미국처럼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하는 추세”라며 “우리가 동남아 등을 묶어 과거 유럽과 같은 인증 연맹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권 회장은 “호주에서 바이오헬스 기업이 임상을 할 때 투자비의 40%를 돌려준다”며 “요즘 벤처스타트업들이 호주 병원에서의 임상을 통해 유럽이나 미국 진출을 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선경 고려대 의대 명예교수(식품의약품안전처 의료기기위원회 민간위원장)는 “저도 의사지만 공학자들은 ‘의사와 사고방식도 다르고 공동 연구 과정에서 소통이 잘 안 된다’고 한다”며 바이오헬스 융복합을 위한 ‘의기투합(醫技投合)’을 강조했다. 선 교수는 이어 “우리 의학교육 현장에서도 위기감을 갖고 다양성 확대 노력을 펴고 있다”며 “하지만 예전에 의학전문대학원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SCI 논문까지 쓰던 역량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져 아쉽다”고 토로했다. 미국처럼 4년간의 비의대 과정을 마친 뒤 4년간의 의전원 체제를 다시 도입해야 의사과학자 양성과 의사 창업 활성화를 효과적으로 꾀할 것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KAIST에 이어 포스텍·UNIST도 내년 의과학대학원을 가동하고 장차 학부 중심 의대 도입을 원하고 있으나 의전원 체제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앞서 27개 대학이 노무현 정부에서 다양한 의사와 의과학자 양성, 기초의학 발전을 목표로 의전원으로 전환(부분 포함)을 추진했다가 이후 거의 대부분 의대 체제로 복귀했다.
왕 원장은 “과거 의전원을 할 때 교육부에서 모두 4+4년제로 하라고 했다가 실패한 뒤에는 오히려 못하게 해왔다”며 “현재 2+4년제(예과 2년, 본과 4년)와 4+4년제를 자율적 비율로 시행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에 대해 권 회장도 “다양성이 중요하다. 학교마다 자유롭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고 힘을 보탰다.
최윤희 산업연구원 신산업실 선임연구위원(공학한림원 코로나19특위 위원장)은 “해외 환자를 유치한다고 해도 의료 시장이 크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진단기기에서 나아가 의약품, 의료기기 제조 산업화와 수출 확대를 꾀해야 성장 동력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미국의 칼일리노이의대 등을 예로 들며 공학·의학 융합연구, 학제 간 융합교육, 데이터 활용·비대면 의료 등의 활성화를 위한 제도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왕 원장은 “정부가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바이오생명과학 대국을 만들기 위한) 전반적인 플랜과 조망이 없다”며 “공학계와 의학계가 협력 생태계를 구축하면 국부 창출, 사회 안전망 확충, 국가안보 등 여러 효과가 클 것”이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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