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물든 단풍이 노을보다 더 빨갛다. 이 단풍은 서리가 내려도 시들거나 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발상과 기계의 미학이 함께 만든 풍경이기 때문이다. 공학과 다양한 기술을 예술에 접목하는 미국의 예술가 트레버 페글렌(48)의 신작 ‘멀트노마 폭포(Multnomah Falls Deep Semantic Image Segments)’다. 미국 오리건주의 컬럼비아 강 협곡에 자리 잡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긴 189m 높이의 멀트노마 폭포를 촬영한 것이다. 페글렌은 사진의 전성기였던 19세기 이래로 사진작가들이 많이 작업한 ‘랜드마크’를 찾아다녔고, 그 시절의 옛 카메라로 풍광을 찍었다. 그렇게 촬영한 흑백사진을 출력한 후 인공지능(AI)에게 색(色)을 맡겼다. 나름의 학습을 수행한 인공지능이기에 아주 그럴싸한 ‘자연의 색’을 완성했다. 분명 실재하는 풍경이건만 현실보다 더 웅장하고 초자연적인 느낌을 풍기는 이유다.
용산구 한남동 페이스(PACE)갤러리 서울 2·3층 전시장에서 페글렌의 개인전 ‘색채 표기법(A Color Notation)’이 24일까지 열린다. 예술을 전공했지만 다른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커 지질학 박사까지 된 페글렌은 2018년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와 함께 최초의 위성 예술작품 ‘궤도 반사경’을 쏘아올린 작가다. 백남준미술상 수상, 광주비엔날레 참여 등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이번 전시는 대중에게 깊이 각인된 역사적 장소, 익숙한 풍경을 선택하되 삼되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거친 변화에 주목했다. 전투기 조종과 미사일 발사에 사용되는 사물추적 시스템, 자율주행차의 물체 인식 등을 접목한 작품에는 미세한 선과 도형들이 얹혔다. 작가는 “우리는 구름을 보며 토끼구름, 고래구름이라고도 부르지만 기계가 보는 자연은 전혀 그렇지 않다. 기계가 보는 것은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우리가 보는 세상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 세상에 무엇이 있을지 탐구해온 결과물이다”고 말했다.
별안간 닥쳐온 겨울 추위에 떠난 가을이 아쉽다면, 혹은 꽃잎 만발했던 아름다운 계절이 그립다면 이곳 페이스갤러리를 찬찬히 돌아보면 좋을 듯하다. 1층 전시장에서는 예술·기술·디자인과 자연의 교차점을 모색해 온 작가그룹 팀랩(Teamlab)의 전시가 24일까지 열린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꽃이 피어 만발했다가 꽃잎으로 흩날리고 떨어지는 과정을 통해 생사의 순환을 보여주는가 하면, 물 입자의 계산된 궤적에 기반한 파도의 움직임을 통해 실내에서 바다의 움직임을 경험하게도 한다.
그 옆에는 9월에 개관한 ‘오설록 티하우스’가 있다. 지난 달에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대형 풍경화 2점이 이곳에 걸렸다. 호크니가 2011년 10월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그린 아이패드 드로잉 기반의 풍경화다. 나란한 235.6×177.2㎝의 그림 두 점이 거울 천장에 비쳐 한쪽 벽면 전체가 숲 속으로 통하는 듯하다. 비매품이지만 10억원에 육박하는 고가 작품이다. ‘티켓 투 더 갤러리’ 같은 이곳 만의 특별한 음료를 곁들여 감상하면 계절과 공간을 초월한 즐거움을 경험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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