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말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사태 이후로 나타난 단기자금시장 불안 국면이 3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환매조건부채권(RP) 시장이 버텨주는 가운데 기업어음(CP) 금리 상승세가 멈추고 한전채 발행 금리가 하락했지만 올 연말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아직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은행은 과거 위기 사례를 비춰볼 때 자금시장이 안정을 되찾기까지 최장 6개월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부동산 경기가 경착륙할 경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이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점차 커지고 있다. 이미 지방 건설사나 중소형 증권사를 중심으로 위기감은 고조되고 있다. 회사채 시장 부진에 대출을 빠르게 늘린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채무 상환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금융시장 곳곳이 지뢰밭이다.
CP 금리 상승 멈추고 한은 RP매입 수요 미달
6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5일 CP(91일물) 금리는 연 5.54%로 3거래일 연속 같은 수준을 기록했다. 지난 9월 22일부터 12월 1일까지 49거래일 연속으로 나타났던 상승세가 멈춘 셈이다. CP 금리 상승세가 멈추면서 단기자금시장 경색이 해소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온다.
여기에 한은이 단기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실시 중인 RP(14일물) 매입 경쟁입찰에서도 수요 미달이 발생하면서 자금 확보에 서두르지 않는 모습이 나타났다. 한은은 지난 5일 두 번째로 실시한 RP 입찰에서 3조 5000억 원을 매입할 예정이었으나 3조 3000억 원만 응찰해 2조 6000억 원을 낙찰했다. 한은 관계자는 “자금 수요나 낙찰 금리 등을 봤을 때 자금 수요가 많지 않은 상황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번 RP 매입엔 수요 미달이 발생했지만 연말 자금 수요가 어떻게 될진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14일물 만기가 돌아오는 12월 19일 RP 경쟁입찰 결과를 지켜본 이후에나 자금시장 안정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한은 금융시장국은 5일 발표한 ‘최근 단기금융·채권시장 불안의 파급 과정 및 현 상황 평가’ 자료를 통해 당국의 시장안정대책 이후 우량물 중심으로 회복 조짐이 있지만 CP 시장에 높은 신용 경계감은 여전하다고 분석했다.
“위기 이전으로 회복하려면 3~6개월 걸려”
한은은 9월 이후 CP 시장 불안이 나타난 것은 여러 요인이 복합 작용한 것으로 분석했다. ① 한은과 미국 연방준비제도(Feb·연준)가 통화 긴축을 강화하는 가운데 한전채 대규모 발행으로 구축 효과가 나타난 상황에서 ② 금리·환율 급등으로 고유동성 자산 수요가 확대되면서 은행채 발행마저 급증했다는 것이다. ③ 결정적으로 레고랜드 PF-ABCP 사태로 지방자치단체가 보증한 채권도 불안해지는 등 신용 경계감이 시장 전반에 영향을 주면서 ④ 은행채·공사채 발행 여건이 악화되는 등 신용채권 위축이 심화됐다. ⑤ 결국 CP 금리 상승으로 차환이 어려워지고 10월 중순 이후 국고채 투자 심리까지 흔드는 등 시장 전반으로 불안이 확대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최근까지 CP 금리가 5%대로 높은 수준을 이어가는 것도 이후로도 위축된 투자 심리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니마켓펀드(MMF), 증권사 특정금전신탁 등 주요 CP 투자 주체의 자금 유출세가 지속되면서 매수 여력이 축소된 것도 CP 금리 상승 압력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 연준의 긴축 속도 조절 기대감이 나오면서 환율도 1300원 수준으로 급락하는 등 대내외 여건이 완화됐다는 정도다. 하지만 국고채 금리가 하락하는 만큼 신용채권금리가 떨어지지 않으면서 신용 스프레드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이에 증권사 CP와 PF-ABCP를 중심으로 발행이 여전히 부진하다. 공사채가 다소 원활해졌다고 해도 회사채나 여전채 발행 여건은 좋지 않다.
향후 CP·신용채권시장이 회복되려면 무엇보다 금리·환율 변동성이 확대되지 않아야 한다. 연말 자금 수급 변동성도 무사히 넘겨야 한다. 만기를 앞둔 증권사 CP(15조 7000억 원), PF-ABCP(17조 2000억 원) 등이 원활하게 차환될지가 중요하다. 부동산 경기가 경착륙할 경우 PF 브릿지론 등 취약 부분을 중심으로 부실이 커지면서 시장 불안에 다시 불이 붙을 수 있다. 향후 부동산 경기를 가늠할 수 있는 둔촌주공 분양 성적에 한은과 금융 당국이 관심을 두는 이유다.
한은 금융시장국 관계자는 “향후 정책 효과가 점차 가시화되겠지만 연말 자금 수급 여건, 잔존 리스크, 과거 경험 등을 비춰볼 때 회복엔 상당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라며 “글로벌 금융위기 등 과거에도 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기까지 3~6개월 이상 소요됐다”고 설명했다.
대기업 채무 상환 부담 커지고 RP 금리도 흔들
문제는 CP 시장이 아닌 RP나 대출 시장도 불안이 감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대기업들은 회사채 시장 부진으로 은행 대출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기업 한도대출 이용이 늘면서 한도대출 잔액도 크게 증가하고 한도증가율도 지난해 말 28.4%에서 10월 말 33.9%로 상당 폭 상승했다.
한은은 경기 둔화 우려에 그동안 지속된 대출 증가세, 높아진 자금 조달 비용 등으로 업황이 부진한 일부 대기업의 채무 상환 부담이 가중될 경우 재무 건전성이 약해질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 특히 건설·부동산업 등 업황이 부진한 업종과 비우량등급 기업의 한도 대출 소진율이 높아지는 만큼 이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10월 이후로는 시장 완충 역할을 해왔던 RP 시장마저 거래가 큰 폭 늘어나면서 금리 변동성이 커지고 있다. 주요 자금 공급원인 MMF 투자 심리가 급격히 저하되거나 PF 관련 채무 보증 등으로 증권사 유동성 리스크가 크게 확대될 가능성에 유의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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